꼭 29번의 잠 - 8 로마 오전휴식+오후천사의성+지옥철+조각피자
꼭 7번의 잠, 로마 8일
+++
이제 조금씩 적응해 간다 소음에도 그냥 잘 자보겠다는 의지가
소음을 비트 있는 음악 삼아 이불속에서 오래 뭉기적댄다
일상이라면, 매일의 오전과 오후를 꽉꽉 채워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은 없지
그래, 오늘 오전의 시간 정도는 게으름에 양보하자
그래도 아침은 먹었다 배가 든든하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시작할 힘이 안 난다 오랫동안 그렇게 길이 든 몸이다
아주머니에게 오늘은 오후에 나간다고 얘기한다 아주머니가
내일은 로마의 holiday고 겨울 50% 세일도 시작한다고 말해주신다
어떤 휴일인지 찾아보니 Epiphany 주현절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는 종교와 관련된 휴일이니 제법 중요한 날일지도 모르겠다
+
pm1시가 지나고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한다
일상이라면, 이라는 가정을 한다고 해도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도 못할 짓이다
산책이라도 다녀야 몸도 정신도 건강할 테니까
시외버스인가 싶은 다른 모양의 버스를 타고 독일에서 사서 쟁여놓은
당 충전용 하리보를 질겅질겅 씹어 먹는다 내릴 곳은
종점에서 한 정거장 전이니 조금 덜 긴장하고 편히 있어도 좋다 싶다
트램과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천사의 성
카스텔 산탄젤로 Castel Sant'Angelo
오늘이 로마에서 처음으로 영하의 기온으로 떨어진 날이고
바람도 몹시 불어 모자를 뒤집어써야 했지만 날이 맑고 좋아서 걷고 싶다
천사의 성은 다리를 건너서 봐야 더욱 멋지게 볼 수 있고 고개도 덜 아프니까
성에 들어가기보다는 우선 다리를 건넌다
뒤를 돌아보며 걷다 보면
점점 한눈에 들어오다가 점점 풍경과 어우러지며 작아지는
천사의 성이 엽서의 사진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다리를 건넌 김에 다음 다리까지의 멋진 길을 걸었고
강과 가까이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기도 했으며
다시 올라와 건너편으로 넘어온 길에서
시선을 홀려버린 거대한 건물들을 넋 놓고 보다 보니 어느새 천사의 성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 까마득할 정도로 멀리 왔나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일도 모레도 그 자리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 앞에서
그렇게 걸어온 곳에서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뮤지엄을 만났다
이런 만남이 있으니 되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은 더 간절하지 않다
이곳은 피카소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은 아니고 피카소와 관련된 정보와 전시
서점을 겸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뜻밖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뜻밖의, 라는 것은 여행의 긍정적 수식이다
이 길로 가면 여기쯤이 나오지 않을까, 지도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되었다 스스로를 과신하다니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가진 주제에
바티칸 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포폴로 광장이 나와서
어안이 벙벙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걸까
서울과 비교하면 로마가 크지 않은 도시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완전히 동떨어진 장소라고 생각했건만 이 길 이 방향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포폴로 광장에 세 번째 도착했다
로마 도심을 제대로 다니기 시작한 후 6일째가 된 지금
어쩔 수 없다 되돌아가는 게 나에겐 더 도전이라서 오늘은 그냥
쇼핑을 하면서 여태 잘 눌러둔 구매욕을 좀 채워보자 싶었다
그렇지만, 그럼 그렇지,
정작 마음에 드는 건 신상이던지 세일 폭이 거의 없다
쇼핑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운동화와 가방 욕심은 그래도 또 많아서
우선은 이것저것 찜해두기만 한다 아직은 떠날 날이 머니까
로마에서는 오래 머물지만 이 한 달이 또 끝이 아니라서
짐의 부피를 마구 늘일 수는 없어서 큰 욕심을 부리지는 않기로 한다
+
떼르미니 역으로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해가 지고 있다 사실 해가 지는 풍경은 어디에서도 멋지다
그날의 하늘과 그날의 구름과 그날의 지는 빛깔이 조화롭다면
떼르미니 역에서 보는, 노을 물든 구름이 노니는 푸른 저녁 하늘도 멋졌다는 말
오늘의 수확은
하나, 처음으로 트램에서 지옥철을 경험했다 이건 경험치의 수확
pm6시 경의 교통체증은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다음엔 이 시간을 피해야겠다
둘, 즉석으로 만들어 주는 대형 조각 피자를 겨우 2.27유로에 샀는데 맛이 기막혔다
역시 이탈리아는 피자인가 마트에서 파는 피자가 이러기 있나
다음에 다른 종류로 또 사서 먹어봐야지
두 번 이상은 먹어봐야 검증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는 행복한 핑계를 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