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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Feb 25. 2020

영화 아웃브레이크와 '90년대 감성

바이러스는 중립적이지만, 우리는 중립적일 수 없다

며칠 전부터 신종코로나바이러스-19와 관련해서 무지막지하게 많은 기사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우한폐렴과 신종코로나 명칭에 대한 논의부터, 국경 봉쇄에 대한 양자의 의견들, 종교단체에 대한 비난과 당국의 대처에 대한 불만까지 정말이지 수만가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나는 감염자가 다수 나온 지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서 거의 실감을 하지 못했지만, 지역 내 확진자 1명이 나온 뒤에는 갑자기 마트에서 장보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다음날에는 전시도 잠정적으로 휴관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이 놈의 유행병이 내 삶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유행하는 화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것과 관련된 책을 읽어대는 것이다. 마침 집에 있던 바이러스학, 미생물학, 공중보건학, 전염병과 관련된 책(건강염려증 환자의 필수품이다)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영화로 넘어갔다.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95년도에 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 <아웃브레이크>였다. 


영화 <아웃브레이크>에서는 모타바 바이러스라는 가상의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바이러스가 1967년 아프리카 자이르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 미국은 감염된 환자들이 있던 고립된 마을을 폭격하여 그 흔적을 없애버렸는데, 그로부터 30여년 뒤 80%가 넘는 치사율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샘 다니엘스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그 바이러스는 미국땅의 한 마을에서 대유행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어렸을 때 그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국가적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에게 큰 인상을 받곤 했다. 그 외에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던 것은, 출혈로 신음하는 환자들의 모습, 귀여운 원숭이, 그리고 한국에서도 약간의 화제가 되었지만 영화 후반에 갑자기 등장하는 한국어 '잘 모르겠는데?'다.(영화를 보면 안다) 


갑자기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졌던 나는 VOD로 추억의 그 영화 <아웃브레이크>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와 같은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040#




영화 자체는 잘 만들어진 바이러스 추적극이다. 주인공이 바이러스의 숙주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액션형(?) 역학조사는 가히 지금봐도 역대급이라고 할 만하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았다. 바이러스에 관한 영화로써는, 아직도 이 영화는 나에게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일 것이다. 


문제는 1990년대였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나는 최근에 1990년대의 틴영화의 상징과 같은 영화 <클루리스>를 다시 봤는데 다 보고 나서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고등학생인 주인공과 애인이 되는 사람이 대학생-양오빠라는 사실을 안 순간 '아동학대'와 '미성년자 성학대'가 머리 속에서 수도없이 맴돌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던 <프렌즈>를 보다가도 남자주인공의 대사가 요즘 기준으로는 성희롱에 가까워서 아연실색했다. 옛날 영화는 그때 봤던 그 영화가 아니다. 우리는 인권감수성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현대에 살고 있고, 그런 우리에게 이 영화들은 그때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이사를 가는 전 부인에게 개를 맡기고는 기한 내에 나타나지 않는 이 남자를 보면서 불쾌감을 먼저 느꼈다. 아무리 본인의 뜻이 옳다고 한 들, 제뜻대로 되지 않으면 상사를 설득하다가 소리를 지르고 제멋대로 규정을 어기는 주인공을 보면서 어딘지 모르게 최근에 내가 자주 보곤 하는 공공장소에서 악을 써대는 인간들이 떠오른다. 다른 기관이 관할하는 감염자 발생지에 가서 책임자인척 하는 데다가(이건 공무원사칭?)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글을 써놓은 화이트보드에 커피를 뿌리는(직장내 갑질?) 이 주인공이, 마지막에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대량생산해낸 건지 놀라운 치료제를 감염된 전 부인에게 주면서, 다시 잘 해보자고 말하는 시점에서 나는 "안돼! 그 사람은 안돼!"하고 왜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 너무나 재미있다. 바이러스의 숙주를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너무 흥미진진하고 스릴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 원더키디가 우주여행을 떠날거라고 예견되었던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이제 막 정치적 올바름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한 장밋빛 경제적 호황기인 199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불과 30년의 시간차였지만, 그 차이는 너무나 깊었다. 


이러한 괴리는, 나에게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둘러싼 지금의 상황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는 이 바이러스를 지역명으로 부르고자 하며, 어떤 이는 중립적인 이름을 부르고자 한다. 어떤 이는 최초 감염자 발생지를 차별하고, 어떤 이는 감염자로 차별받을까봐 두려워한다. 각기 다양한 이유로, 바이러스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비난하는데에 이용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바이러스를 보고 있음에도 이렇게 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이러스의 존재는 달라지지 않았다. 무생물과 생물의 경계에 있는, 유전물질로 이뤄져 세포에 침투하는 이 불가사이한 존재는 여전히 감염을 퍼뜨리고 사라졌다가 변이하고 다시 나오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둘러싼 우리 인간은 항상 다르다. 바이러스는 중립적이지만, 우리는 절대로 중립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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