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시대에 비하면 거의 찰나에 불과한 인류사에서 보면, 산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건물이나 도로를 짓기 위해 기슭이 깎이고, 석재 채취를 위해서 모양이 변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고 어쨌거나 산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어왔다.
인류사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산에 갔다. 물론 실용적인 이유였다.
사냥을 위해, 채집을 위해 산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도망치거나 대피할 곳을 찾아 산을 오르기도 했다. 도가에서는 은둔을 위해 산을 찾았고, 불가에서는 산 속에 절을 지었다. 알프스의 하이디네 가족들은 아마도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산에 살았고, 적과 게릴라전을 하기 위해 산 속에 숨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짧은 루트를 찾은 도보 여행자들도 있었고, 그들에게 강도질 하려는 산적도 있었을 것이다.
산에 가는 것이, 특히 산을 올라가는 것이 탐험이 되고 모험이 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주의의 확장과 궤를 함께 한다. 많은 탐험가들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탐사를 떠났고 그들이 간 곳 중 하나는 ‘정복하기 힘든’ 높은 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측량법이 발달하면서 등반가들은 최고봉에 오르는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경쟁했고, 이 흔적은 지금까지도 에베레스트에 남겨진 수많은 썩지 않는 쓰레기로 잘 남아있다.
나는 근대 시기 한국 등반사를 볼 때면 이즈미 세이치라는 이름이 항상 눈에 띤다. (대학원 때 그에 대해서 공부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한라산에서의 최초의 조난 사망 사건은 1936년에 있었는데, 이때 경성제국대학 산악부 등반대를 이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이즈미 세이치다. 경성에서 자라며 식민지 조선을 고향이라고 부를 자격도 있을 법한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등반 기록은 미묘하게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의 확장과 궤를 함께한다. 그는 일본의 금강산 개발 관계자의 도움으로 비로봉을 등반했고, 그가 인류학 조사를 했던 만주와 중국, 중앙아시아의 지역들과 그 곳에서의 등산은 일제의 남만주철도회사와 뗄레야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산을 ‘등산한다’라는 개념이 식민지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언제부터 등산에 열광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6.25 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에는 등산 따위를 즐길 힘도 없었을 테고, 일제의 수탈과 전쟁의 흔적으로 인해 산도 거의 민둥산이 되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아는 한 7~80년대부터 대학 산악회들이 국내 곳곳의 산을 등산해왔고, 보통 사람들도 여름 휴가철이 되면 텐트를 짊어지고 산 속에 들어가서 고기를 구워먹는 것을 즐기게 되었으며,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운동 삼아 뒷산 약수터에 물을 길러 다니는 습속이 생겼다. 내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바둑이와 영희와 철수가 나오는 약수터 풍경도 바로 이런 시대적 맥락일 것이다.
현재 한국인에게, 먼 곳에 있는 산을 간다는 것은 관광이나 모험의 개념이 크다. 가보지 않은 낯선 경치를 보러 가며,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가는 것이 그 여정의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뒷산은 다르다.
집 뒤에 있는, 혹은 확장된 개념으로 집 앞이나 멀게는 같은 동네에 있는 산은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운동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가볍게, 물 한 병 들고 갈 수 있는 산이 뒷산이다.
누군가에게는 등산로의 출발점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에게는 시원하게 땀을 뺄 수 있는 운동 장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뒷산이 산책로가 될 수도 있다. 뭐,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빨리 걷고 싶으면 빨리 걷고, 천천히 걷고 싶으면 천천히 걷는다. 우거진 나무를 보고, 숲을 관찰하며, 새소리를 들으면 발걸음을 잠시 멈추기도 한다. 양치식물로 우거진 습지를 지날 때면 예전에 봤던 <쥬라기 공원> 시리즈 영화들을 생각하기도 하고(왜 그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다), 독특한 모양의 이끼를 관찰하기도 한다. 이따금씩 동물 배설물을 보면 어떤 동물일까, 왜 굳이 등산로를 지나갔을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마치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으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플라뇌르(Flâneur)’럼 말이다.
19세기 시인 보들레르에 의해 유명해졌고, 20세기 발터 벤야민이 재정의했던 ‘플라뇌르’라는 개념은 굳이 번역하자면 ‘산책자’, 혹은 ‘산보하는 사람’이다. 이 개념은 사실 도시를 유유자적 걸어 다니는 한량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걸어가면서 도시의 풍경을 관찰하고 그 공간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공간, 도시를 이해하고 사회를 해석하는 문화적 개념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숲 속에서 플라뇌르 되기를 전유하기로 했다.
플라뇌르의 가장 큰 전제는 ‘이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파트를 살 때 한강뷰, 오션뷰를 이야기하는데, 집에서 보는 한강과 바닷가는 실제로 그 공간을 걸을 때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한강을 걸을 때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바닥에 밟히는 감촉, 그리고 넓은 강과 평행하게 이어진 길은 거실에서 유리창을 통해 보는 한강과 다르다. 해변을 걸을 때 맨발에 닿는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과 바닷바람에 섞인 짭조름한 공기, 철썩이는 파도소리 가득한 풍경도 그렇다.
산도 마찬가지다. 산을 멀리서 조망할 때와 그 산을 걸을 때 느끼는 감각과 풍경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나는 더운 여름 날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한 집 안에 들어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는 뒷산도 좋아한다. 하지만 어떤 풍경은 뒷산을 걸으면서만 비로소 볼 수 있기도 하다.
맑은 날 숲 사이로 선처럼 가늘게 새어 들어와 땅을 비추는 햇살과 여러 겹으로 겹칠수록 더 진하게 보이는 연두빛 나뭇잎들의 색상과 길을 가면서 볼 수 있는 거미줄에 맺혀 반짝이는 빗방울 같은 것들은 창문을 통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있어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다시 산으로 들어갔던 인류의 역사로 되돌아가자면, 혼자서 산에서 ‘플라뇌르 되기’를 전유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 것이다.
아무리 주거지 인근이라고 해도 한국의 산 속에는 과거 위험한 맹수들이 살고 있었다. 한 때는 산에 들어가는 것이 불법이거나, 산 속에서 얼쩡댄다는 이유로 간첩 취급을 받았던 시기도 있다. 그러니까, 나의 ‘산에서 플라뇌르 되기’는 다분히 모던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뭐, 애초에 식량을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산에 가는 행위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