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없다? 감정이 없는 생활을 보내다.

2-3.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은 없다.

by 소수지
기분이 없다? 감정이 없는 생활을 보내다.

남한에서는 ‘기분’ 상태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꿀꿀하다, 기분이 언짢다.’ 등 구체적이고 풍부한 표현들이 많다. 솔직한 감정이고, 감정을 잘 이해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듯싶다.

북한에서는 기분을 ‘있다, 없다’로 표현한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 기분을 ‘있다, 없다’라고 ‘이분법’적으로 표현하기에 북한의 생활 또한 감정이 없는 생활이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저녁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 다니는 아들이 TV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나는 몸도 지치다 보니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귀찮았다.

아들에게 소리쳤다.

“아들, 듣기 싫다. 녹음 좀 죽이라!”

아들은 나를 힐끔 쳐다본다. 그러고는 다시 TV에 집중하였다.

나는 화가 나서 다시 소리쳤다.

“소리 죽이라고!!!”

아들은 깜짝 놀라 온몸을 돌려본다. 눈에는 힘이 없었으며 한심한 듯한 인상이었다.

“엄마, TV 소리 낮추라고? 한국에서는 소리를 죽이라고 안 해요.”

“어? 그래?. 듣기 싫으니까 죽이라고 하지. 그럼, 살리라고 하겠니?” 나는 혼자서 얼버무리면서 딴 일을 하는 척했다.

북한에서 보통 ‘TV 소리’를 ‘텔레비죤 녹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북한에서는 ‘죽이다’라는 용어가 은근히 많이 사용된다.

‘소리 죽이라, 불(전등) 죽이라’ 등 ‘죽인다.’라는 어휘가 다양하게 사용한다. ‘불(전등) 죽이라’라는 말 때문에 북한 여성과 결혼한 남한 신랑이 당황했던 일도 있다. 북한 여성은 방에 켜있는 불(전등)을 죽이라고 했는데, 신랑은 방에 불이 난 줄 알고.

집단주의 원칙으로 개인의 감정보다 ‘집단을 위함’을 더 중요시한다. 집단의 ‘위함’이 중요하니 개인의 감정은 무너져버리고 드러날 수 없다. ‘집단을 위함’의 정서는 위력적이다. 집단이 잘 살려면 사회의 적(敵)인 ‘괴뢰, 미국 양키놈, 일제강점기 쪽발이’ 등을 죽이고 복수하고, 보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이 자신들에게 어떤 원한을 주었는지 잘 모른다. 그러기에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죽임’의 어휘는 정말로 죽이려는 마음이 전혀 담겨져 있지 않다. 북한이탈주민과 대화하다 보면 ‘죽여버린다, 맞아볼래?’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죽인다’라는 말은 정말 ‘죽인다’가 아니다. ‘죽인다’라는 표현에는 ‘조심하라, 지금 너를 지켜보고 있다, 나 지금 화가 났다’라는 의미이다. 또 까불면서 귀엽게 노는 동생을 ‘죽을래?, 맞을래?’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죽을래?’라는 ‘너 까불지 말라’라는 농담의 어조이다. 그러니 ‘전등을 죽이라’라는 말이 ‘전등을 꺼라’라는 말보다 더 자연스럽게 많이 사용된다. 단지 북한 사회에서 잘못 배운 단어이고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이 없고, 기분이 없는 북한 사회의 삶이 감정이 풍부한 남한 사회에로의 삶은 오해이고 모순이었다.

혹시 북한 어휘처럼 ‘감정이 없는’ 상태를 겪어본 적이 있는가?

‘기분이 없다’라는 감정의 어휘는 인간의 감정 상태에서 우울증과 무기력, 무감각 등으로 에너지가 없는 상태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인간의 감정 상태에 대해 ‘기분이 없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빠서가 아닌 정신이 없는 상태이다. 사람은 자면서도 꿈을 꾸고, 꿈을 꾸면서도 감정을 느껴서 잠에서 깨면 꿈으로 하여 기분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또 감정은 무의식에서도 반응한다. 그런데 ‘기분이 없다’라는 상태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북한 사회의 환경에서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처참하다.

지금 나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다양한 감정 어휘를 인식하고 탐구하면서 기분이 좋은 하루 또는 기분이 나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감정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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