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샐리 티스데일
사람은 누구나 아프지 않고
편안히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건 헛된 소망일 확률이 높다.
죽음은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죽음은 대부분 처절하며,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감을 지키며 죽기 어렵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죽음을 잘 마주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완화의료 분야에서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했다.
죽음과 가까이에서 일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자기가 깨달은 바를 담담히 썼다.
불교나 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우리는 나이가 들고 아플수록
죽음의 공포나 불안과 마주하지만
그 공포가 클수록 무시하거나
아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근원적인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종교나 철학, 과학 같은
'문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네트워크를 철학, 심리학, 과학, 문화, 종교, 예술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 불안을 온전히 경험하길 거부함으로써 인간은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명 네트워크가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으며,
결국은 받아들여야 한다.
“수용은 거부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이뤄진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신체 기능이 멈춰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때”
“뇌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지각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책에선 죽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지각 능력이
온전치 못할 때인 것 같다.
중증 치매라던지 식물인간 상태를
죽음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죽음의 정의를 고려하려면
삶의 정의를 고려해야 하고,
삶의 정의를 고려하려면
인간의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
지각능력이 없이 숨만 쉬고 있어도
우리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선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여전히 오래 사는 게 좋다고 여긴다.
갑자기 죽는 건 나쁜 죽음일까?”
일반적으로 무조건 오래 사는 것보다는
건강히 오래 사는 게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갑자기 죽는 건 안타깝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나쁜 죽음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죽어가면서
품위를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죽음으로 인한 결과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쁜 죽음은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나 품위를 잃게 되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작가의 요지는
“죽음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당신의 마지막도 특별해 보이길 바라는가?
초월적이고 영적인 죽음이길 원하는가?
하지만 죽음은 그저 처절할 뿐이다.”
“내가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다.
죽음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다.”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가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내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것(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은 삶의 한 부분이요.
살아가는 방식의 한 부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을
좋고 나쁜 죽음은 없다는 것으로,
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의 죽음이 임박할 때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희망이나 자신의 믿음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면 안 된다.
“희망은 위로를 줄 수도 있지만
엄청난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의 임종자리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떠나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우리의 슬픔에 못 이겨
죽어가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작가는 현실적인 조언도 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
“당사자가 처리하기 어려운 자잘한 일을 도와주라.”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에 대해
‘예전의 나는 죽었다’라고 말한다.
앞으로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해준 게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해 주었을 뿐이다.”
“그녀가 있던 다른 세계에 살던 나는 죽었다.”
“다시 행복해질 수는 있지만 예전과 똑같은 행복은 결코 맛볼 수 없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하지만 죽음을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안 좋다.
다만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이것을 세상이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세상 만물은 서로 화합하여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