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미네이션
보통 7박 이내의 여행을 할 적에는 한 숙소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2박 단위로 숙소를 바꾼다. 느긋함과 새로운 장소에의 경험을 맞바꾸는 셈이다. 지난 번 여행 때는 시모키타자와, 시부야, 신주쿠에서 차례로 묵었고 이번에는 하네다 공항, 시부야, 요요기 공원, 신주쿠로 정해져 있었다. 11월의 시부야가 좋았던 나는 사실 그곳에서 내내 있으려 숙소를 알아 봤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었던 집이 예약 직전 다른 사람에게 선택되며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날 묵을 신주쿠 호텔 위치와 가까운 곳을 물색하다가 요요기 쪽과 신주쿠산초메 정도로 압축됐다. 좀 더 잘 갖춰진 숙소는 신주쿠산초메였지만 이상하게 끌리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운명의 싸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요요기 공원 산책이나 실컷 해야겠다는 마음에 그쪽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요요기 공원 역 도보 1분 거리. 호스트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이동하는 길은 초로컬분위기였다. 일요일인데도 무척 조용하고 집 앞 조그만 놀이터에서 아빠와 캐치볼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12월인데도 우거진 녹음이 눈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집은 좁았지만 경치가 그만이었다.
빨래부터 돌린 후 집을 나섰다. 요요기 공원을 따라 하라주쿠를 향해 죽 걷는데 그 거대하고 푸른 풍경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20분을 좀 못 걸어 도착한 다케시타 도리는 여전히 붐볐다. 하라주쿠에서 쇼핑을 마친 후 오모테산도로 걸었다. 오모테산도 B-Side 스타벅스에서 여유를 만끽하려 했으나 역시나 사람이 많은 관계로 실패한 후 지난 번에 가지 못했던 진구가이엔으로 향했다. 콜라 한 캔 말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탓에 배가 고파져서 브레이크 타임이 없어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중화요리집이었는데 정말 만족스러웠다. 블로그 맛집을 체크하는 것보다 이런 식의 무작정 식사가 훨씬 타율이 좋았다.
디저트로 나온 안닌두부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주인상에게 저 하얀 것이 뭐냐고 묻자 음식에 이물질이라도 나온 줄 알고 깜짝 놀라길래 너무 맛있었다고 칭찬을 해 줬다. 그제야 주인은 선한 눈으로 맛이 없어서 그러시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와서 진구가이엔에 도착했다. 아네고와 쿠로사와의 첫 데이트 접선 장소인 은행나무길.
사람은 많았지만 조용했다. 차량 진입을 막아 두어 뻥 뚫린 은행나무길은 황량하다기보다는 황홀한 고독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다시 오모테산도로 돌아왔다. 해가 진 명품 거리에는 일루미네이션이 반짝이고 있었다. 육교에서 멋진 풍경을 찍고 싶었지만 일루미네이션 시간 동안은 통행 금지였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일본의 모습은 이런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모테산도 역에서 어제 보지 못했던 메구로 강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일요일 저녁이면 보통 다음 주를 준비하기 위해 집에 일찍들 들어갈 줄 알았건만 인산인해였다. 그만큼 메구로 강의 빛은 예뻤다. 허탕을 한 번 정도 쳐 줘도 괜찮았다.
세상 사진작가가 된 듯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에 섞여 나도 사진을 엄청나게 찍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뭔가 시간이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11월에 보고도 제대로 찍지 못했던 히비야 시티에 다시 가기로 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심지어 일요일이라 내가 보려던 구조물에 조명이 꺼져 있었다.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갈 것을 그랬나 싶었다. 요요기우에하라 역 내 식당에서 소바와 가츠동 세트를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하라주쿠에 걸어 가서 디저트를 먹었다. 한국에서도 카페에만 가면 커플들이 싸우는 꼴을 보는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몹시 숙연해졌다. 귀갓길에는 요요기 공원의 일루미네이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열심히 빛을 뿜는 파란 전구들이 마치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오늘의 혼술 장소를 고민했다. 요요기하치만과 요요기우에하라의 정 가운데서 묵고 있는 덕에 동네 술집에서 마시기는 괜찮은 환경이었다. 11시 쯤 집을 나와 가게들을 둘러 보는데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시부야에서의 혼술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귀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눈 앞에 두 개의 바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바깥에서 보기에 손님 한 두 명 정도가 마시고 있는 듯한 가게로 들어갔다. 내 여행 최고 행운의 순간이었다.
진입하자마자 주인상을 비롯해 손님들이 깜짝 놀란 눈치길래 왜 그런고 했더니 너무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구석에 앉아 가쿠하이볼 한 잔을 시켜 놓고 안경을 벗어 피곤한 눈을 주물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피곤한 듯 눈을 비비길래 말을 시켰다고 했다. 관광 중이라고 밝히니 출신을 물어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가게 안 모두와 한국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 배우, 감독 등 화제도 다양했다.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냐기에 따로 공부한 적은 없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레 익힌 것 같다고 말하니 스고이네~ 가 쏟아졌다. 초등학생 이하의 일본어로도 이렇게 칭찬을 받다니...
쇼와 아이돌과 시티팝을 좋아한다고 하니 “시부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그때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가는 곳마다 취향 얘기를 하면 이 말을 들었다. 뭔가 오래된 듯하고 수수한 멋을 일컫는 말으로 보였다. 손님들은 하나 둘씩 가게를 나가고 나 혼자 남아 주인상과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인도 모르는 음악을 어떻게 아냐며 내가 말한 노래들 유투브로 찾아서 바로 틀어 주는데 정말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새벽 1시 반까지 마시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적당히 취한 느낌으로 홀로 걷는 철길이 낭만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