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7

익숙한 곳, 다시 걷기

by 나효진

전날 당직의 여파가 컸던지 꽤 오랫동안 잠을 잤다. 한 시 쯤이 돼서야 겨우 일어났다. 이날은 그냥 발길 닿는데로 걷는 것이 목표였다. 집에서 가까운 나카메구로나 다이칸야마 정도가 만만했다. 한참 게으름을 피우다가 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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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메구로는 언제 가도 똑같은 풍경이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장소다. 전철역 초입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운 후 천천히 산책을 했다. 그런데 메구로 강변에 늘어선 나무에 전구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근처에 설치된 안내를 보니 저녁에는 일루미네이션을 하는 듯했다. 시간을 대강 확인하고 밤에 다시 오리라 결심한 후 다이칸야마 쪽으로 향했다.


애매한 시간에 나온 탓에 아점을 먹기가 보통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체인점이 아니고야 대부분의 식당에는 브레이크 타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가게들을 찾아 헤매다 보니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또 아무 식당이나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따뜻한 실내를 내버려두고 그 날씨에도 테라스 흡연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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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아점 메뉴는 부타동이었다. 여유 있게 아이스 커피까지 주문하고 한 술을 뜨는데 고기며 밥이 혀에 닿자마자 녹는 느낌이었다. 배고파서 그런 것이 팔할은 됐겠지만 먹다가 담배를 피우고 또 먹는 한국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 커피를 마시면서 콧물을 흘렸지만 여유로웠다. 추워서 더는 견딜 수 없을 즈음 다이칸야마 츠타야 스타벅스로 향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은 더 많았다. 오늘은 청음을 해봐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앉을 곳을 찾았으나 얌체들은 어디나 존재했다. 음악을 안 듣는데 헤드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몇 보였다. 그래서 나는 들을 CD들을 골라서 서서 청음을 시작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도감, C-C-B, 오오타 메구미 등을 집어서 좋아하는 곡들을 들었다. 매일 듣는 노래였지만 감상이 남달랐다. 그래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CD들을 고르고 듣기를 반복했다. 내가 찾는 음반들이 구비돼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80년대 아이돌, 시티팝 등으로 섹션이 정리돼 있어 찾기는 확실히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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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소가레도키를 맞은 츠타야에는 파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 저번 여행 때 동생의 선물을 대충 샀던 것이 기억나 시모키타자와로 가서 옷을 몇 벌 사려고 다이칸야마를 떠나 시부야로 갔다. 시부야에서 시모키타자와는 갈아탈 필요도 없이 금방이었기 때문이다.


시부야 역 둘레에는 무려 11개의 흡연 구역이 있다. 역 자체가 거대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몇 발짝만 움직이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소리다. 이 나라에도 도보 흡연을 하는 양아치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 비해 적은 것은 이 같이 흡연자들을 배려하는 문화 덕일 터다. 흡연 구역에 적힌 안내가 고독한 흡연자의 마음을 울렸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피우지 않는 사람도 서로 기분 좋을 수 있는 거리를’.


어마어마한 인파와 함께 도착한 시모키타자와는 왠지 질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동네에 대한 감상이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지 내 자신의 변덕이 고스란히 체감됐다. 대충 길을 다 외웠다 생각했지만 턱도 없었다. 추워 죽겠는데 헤매고 헤매기를 반복하다가 옛날 숙소 근처에 줄지어 있는 가게에서 옷들을 사고 저녁을 먹기 위해 커뮤니티를 하다가 본 비프 스튜집으로 갔다.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와 식사를 하고 있는 주민들이 따뜻해 보였다. 일본 식당에는 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하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종종 보는데 나는 이를 음식 다 먹고 나서야 발견했다. 어쩐지 아주머니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벽을 톡 치더라니...


쇼핑과 식사를 마치고 시부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8시 정도였다. 낮에 집을 나오다가 시부야 역 철로 바로 옆에서 본 카페에 가기로 했다. 뭔가 적당히 핫해 보이는 느낌이 맘에 들어 문 닫기 전에 가려 했던 것인데 알고 보니 뉴욕대 앞에 있는 카페였다. 그런데 입구를 찾지 못해 다소간의 창피를 당하고 라떼를 주문해 앉았다. 일본에서 먹어 본 것 중 가장 가성비가 쩌는 라떼였다. 한 시간 정도 오늘 일과를 정리하고 메구로강 일루미네이션을 보려 했다. 그러나 잰 걸음으로 달려간 메구로강은 그저 검었다. 22시까지인 줄 알았는데 21시까지였던 것이다.


헛걸음을 해서 억울했지만 내일이라도 다시 올 것을 다짐했다. 원래 예쁜 풍경 같은 것을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여행지에서는 확실히 태도가 달라진다. 마지막 일정인 혼술을 달성하기 위해 집에서 조금 쉬고 시부야 중심가로 나섰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봐 둔 곳이 몇 군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밤의 시부야 거리는 레벨이 엄청나게 높았다. 모두가 그룹이었고 시끌벅적하기 그지 없었다. 한참을 돌고 돌다가 혼술을 포기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집으로 힘없이 걸어오는 길에 그나마 떠오른 것이 지난 번 항공권 리턴 연장을 고민했던 카페 겸 바였다. 들어가서 바에 앉으려고 했는데 다른 좌석을 권했다. 샹그리아를 시켜 놓고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몹시 쓸쓸해졌다. 도쿄에 오기 전부터 시부야 혼술을 꽤나 기대했었는데 어제에 이어 외로운 결과만이 도출됐다. 바로 가게를 나와 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와인바로 향했다. 늘 새벽 다섯시까지 불이 켜 있는 곳이라 들어갔는데 마감이라며 거절당했다.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침대에 몸을 구겨 넣을 도리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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