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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May 03. 2019

휴가 탈탈 털기

2017.11.17~2017.11.26 ②

대망의 시오링 결혼식날.

나에게 시오링을 소개해주었던 친구와 함께 만나 기모노 렌탈샵에 가기로 했다. 이 친구는 시오링과 벌써 10년 가까이 인연이 있어, 엄마까지 일본에 오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께서는 축의금 5만엔에 나무로 깎은 원앙까지 준비하셨다는 그런...

아, 내 축의금은 빽스텝 불가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1만엔으로 퉁쳤다. 욕을 눌러 참고 말하자면 렌탈샵 가니까 기모노 대여비가 무려 4만엔이었다. 1만엔을 시오링이 내 두었지만 등골을 셀프 브레이킹한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내 취향 기모노를 사전에 택해 두었던 덕에 입은 모습에 만족하며... 축하하러 간 건지 기모노 체험하러 간 건지 주객이 전도되기는 했다만...


이렇게 입고도 팔자걸음을 걸었다는
같이 간 친구의 기모노


기모노를 입고 보니 색깔이나 디자인이 과도하게 착붙이었지만 지울 수 없는 야쿠자의 느낌이... 300엔이면 살 것 같은 꽃핀도 1000엔에 충동구매하고 나니까 헤어를 무료로 해 준다고 했다. 4만엔 내고 말이야 우리나라 인심이면 머리핀도 그냥 주고 메이크업도 해 줄 텐데... 그리고 머리가 많이 짧기도 했거니와 묘하게 일본 헤어 받으면 촌스러워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친구 엄마와 친구가 받으라고 성화여서 결국 머리까지 했다. 음... 미묘하게 그냥 그랬다. 얼굴 들고 못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친구네 호텔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친구가 화장을 하란다. 쌩얼주의자로 여태껏 다녔던 숱한 관혼상제 경조사에 면접에서도 립스틱 이외에는 민낯을 고수했던 나였지만 친구의 푸시에 얼굴 쓰다듬는 정도로 뭔가를 발랐다. 그래서, 화장은 결국 예의였던 것일까?


친구의 화장이 길어져 결국 아슬아슬하게 식장에 도착했다. 축의금 접수하는 곳은 이미 닫혀 있었다. 게타를 불편해하지 않는 나에게 친구 엄마께서 '전생에 일본인이었던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ㅋㅋㅋ 그런데 정말 의외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래 걸으면 또 모를 일이지만.


결혼식은 생각만큼 소수정예는 아니었다. 신랑측 신부측 모두 회사 사람들도 적당히 섞여 있는 듯했다. 시오링은 출산 후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입장부터 아기가 등장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시오링 아버지께서는 역시 결혼식이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 버벅대셨다. 주례가 없다 뿐이지 우리나라 결혼식과 비슷한 식순이었다. 15분에서 20분 정도 진행 후 하객들은 스태프가 나눠 준 꽃을 뿌리고 피로연장으로 향했다.



피로연은 지정 좌석이 있어서 축의금 내면 자리를 안내받는 식이었는데 우리는 축의금 내는 타이밍을 놓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시오링의 친구들이 몰려 있는 테이블이었다. 시오링이 어릴 때 외국을 활발히 돌아다녔던 덕인지 중국 친구, 한국 친구도 있었다. 피로연 식순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랑 비슷하게 친구들 장기자랑, 편지 낭독, 케익 커팅 같은 것들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친구들 장기자랑에는 나가부치 츠요시의 '건배'가 가장 많이 선곡되는데 이날도 그랬다.



아기 모형이 올려져 있는 귀여운 케익이 등장했다. 일본은 신랑신부가 케익을 자른 후 신부가 삽 같은 거대한 스푼으로 신랑에게 케익을 먹이는 풍습 비스무리한 게 있다. 얘네 나름의 즐거움인갑다 했다.


결혼식 식사는 프랑스식과 일본식 중 택1이었다. 무난한 일본식으로 했다. 스테이크 메인의 코스가 나왔다. 음식을 먹으며 신랑신부의 행복한 한때가 담긴 영상을 감상하는데 엔딩크레딧에 나와 친구의 이름이 나왔다.



그렇게 식이 끝나고 나니 꽤 늦은 저녁이었다. 기모노에 짐에 도저히 우리 동네까지 전철타고 갈 수 없어서 큰 맘 먹고 택시를 질렀다. 3000엔이 넘게 나왔는데 그러려니 했다. 오늘 하루는 이 기모노를 입고 3만엔 어치 뽕은 뽑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바로 타나로 가서 패션쇼 하고 낮부터 열렸던 오셀로 대회를 구경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전통의상 체질인 건지 어릴 적부터 한복도 불편한 줄 몰랐는데 기모노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모노의 허리띠인 오비를 한껏 조여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그다지 쫄리지 않았다. 물론 내가 날씬해서는 절대 아니다. 반드시 3만엔 어치는 입겠다고 다짐했는데 불편해서가 아니라 질리는 바람에 자정쯤 집에 가서 기모노를 벗는데 끈이 무슨 열 몇 개가 나와서 이거 진짜 혼자는 못 입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오늘도 아침까지, 주변이 잠들 때까지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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