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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May 04. 2019

휴가 탈탈 털기

2017.11.17~2017.11.26 ⑦, ⑧, ⑨, ⑩

지옥과도 같았던 술파티가 끝나고 이번 여행도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루종일 방에서 뒹굴다가 오랜만의 장기 여행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빨래를 좀 하자 싶어 동네 목욕탕으로 향했다. 딱 봐도 몇십년은 한 자리에서 해 온 듯한 목욕탕에는 셀프 세탁도 가능하도록 이것저것 마련돼 있었다. 여기는 처음 이 동네에 와서 혼자 술 마실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눈에 담았던 곳인데, 잠깐 벤치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홍콩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다만 저 세제 자판기가 너무 낡아서 돈을 먹을까봐 무서웠다


빨래 건조까지 마치고 집에 갖다 놓고 언제나의 코스를 밟았다... 이번 여행부터 알게 된 카케이랑 타나에서 일본 아이돌 메들리로 가라오케 타임 좀 보내고... 나중에 감독 등등이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이자카야로 불러서 카메라맨 요쨩이랑 함께 이동했다. 이 여행기에도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 아무튼 한 네시 반까지 마시고 나니 카케이는 한겨울에 땅에 눕고 난리가 나 있었다.


ㅉㅉㅉ...


그리고 나는 나나메에 갔는데 BGM에 고집 있는 텟쨩이 웬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서 틀어주었다. 그 순간이 너무 낭만적이었다. 매일 뉴오더 이런 거 아니면 무슨 자연의 소리 같은 걸 틀어두는 텟쨩이... 유치한 가사 속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 파고들었다.



다음날은 시오링과 약속이 있었다. 기모노 체험으로 치면 시오링의 결혼식은 참 재미있었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상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날 만남도... 나는 일본에 서쪽에 있고, 시오링은 동쪽에 사는데, 적어도 중간에서 만나자고 할 줄 알았거늘 지네 동네로 나를 불렀다. 애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기에는 도쿄는 꽤 엄마들에게 친화적이다. 그래도 이번 여행의 핑계는 온전히 시오링이었기에 밥값도 내가 그냥 내 버렸다는 슬픈 소식... 밥 먹고 차 마시러 이동하는 줄 알았는데 수유였나 기저귀 갈기였나 그거 하자고 나를 안 보내고 끌고 다녔다는 그런 뉴스... 2시간도 안 보고 헤어졌는데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기에 눈에 띄는 찻집에 들어갔다. 그나마 좋아하는 분위기의 킷사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본 은행 색이 너무 예뻤다.


이때부터였을까... 여행객 다운 관광지 탐방과 쇼핑이 아예 사라져버렸던 것이... 마시고 자고 마시고 자고 그런 날들은 이날도 계속됐다. 타나에서 DJ를 하면서 마시고 있는데 감독이 애타게 찾기에 금방 돌아오겠다고 하고 aux로 향했다. 나베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별로 안 먹고 싶어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타나로 돌아와 이리에상이랑 음악 얘기하면서 놀았다. 내가 이 바에서 노래를 틀면 타나랑 이리에상이랑 나랑 이 세 명 콤비가 참 죽이 잘 맞는다.



일어나보니 패키지가 몹시 숭한 자양강장제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분명 어제 받아온 것이겠지...



치쨩에게 줄 편지를 쓰기 위해 늘 가는 미야마에 앉았다. 아 정말 글 쓸 때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쓰고 읽으면서 내가 자꾸 울컥하고 만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밤이기 때문에 헤파리제를 특별히 프리미엄으로 준비해봤다. '라스토나이토'라고들 하는데, 사실 문법상 last night는 어젯밤이기 때문에 맞지 않지만 이게 동북아시아 민족들의 한계 아니겠는가.



이번 여행 마지막 식사를 뭘 하고 싶냐 해서 고기라고 답하니 정말 고기를 조금씩 구워서 주는 이탈리안 식당에 데려가 줬다. 치쨩, 이리에상, 유우키, 히데상에 나까지 다섯이 모였다. 여행기에도 썼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첫날이랑 마지막날 사람들이 나와 줄 때가 가장 고맙다. 이 즈음만 해도 도쿄의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던 때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샴페인 한 병 따고 타나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이니까 또 음악을 틀라고 했다. 새로운 캐릭터들도 속속 나타났다. 결국 내 여행은 사람을 향한 여행이었던 모양이다. 네이바에 들러 치카라상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타나로 돌아오니 주인이 예거 샷을 돌렸다. 여기에 내가 선물한 한국 술도 돌리고 나니 얼큰히 취해 귀가할 수 있었다.



하네다로 향하는 길은 늘 쓸쓸하다. 낮 비행이다 보니 배가 고파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때마침 동네 사람들한테 라인이 오기 시작해서 울면서 먹어 치웠다. 전날 치쨩이 건넨 봉지에는 하코네에서 산 사탕이 들어 있었다. 비행 두 시간 동안 담배를 못 피우니 입이 심심할 때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코네 선물가게에서 나를 계속 피하기에 내 선물을 사려나보다 했는데 나름 감동적이었다.




꽉꽉 채워 탈탈 턴 휴가 첫 해외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바로 다음날부터 인터뷰가 있는 것이 괴로웠지만, 이국의 동네에 조금 더 스며든 느낌이 기분 좋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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