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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내게 맞는 여행을 찾는 기쁨

안 하던 걸 안 하던 공간에서 안 하던 시간에 하기

부산에 머문 사흘 내내 이른 아침에 깼다. 광안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숙소 창문가에 앉아 있다 보면 광안리의 모습은 밤과 아침이 전혀 다르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다.

광안리 해수욕장은 밤늦게까지 여행객들의 폭죽 소리로 소란하다가 하늘이 밝아지는 새벽 5시부터는 부지런한 현지인들의 운동 코스가 된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손에 휴대폰이나 카메라 따위는 들지 않은, 매일 아침 여길 걸어서 몸에 밴 익숙함이 묻어나는. 누가 봐도 여행객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나와서 저마다 걷거나 뛴다. 주로 보도블럭이 깔린 산책로를 걷지만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파도가 찰랑이는 바로 그 옆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바다가 산책로라니. 이 커다란 바다가 매일의 운동 코스라니! 평생을 경기도의 내륙 도시에서 살아오며 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산책로만 걷던 내게는 너무나도 낯선 개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이 대해가 누군가에게는 매일 걷는 길이라니.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여행 중인 나야 하얀 광안대교와 반짝이는 윤슬에 매 순간 감탄하며 오늘도 이백서른일곱 번째 셔터를 눌러대고 있지만, 여기가 매일의 산책로인 사람들은 바다가 지겹지는 않을까? 이 커다란 파란색 바다엔 계절마다 달리 피는 나무며 꽃이 있는 것도 아니니 크게 새로워 보일 일이 없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러자 내 상상, 아니 편견 속의 (어쩐지 무뚝뚝한) 부산 사람이 답한다. '생각은 무슨, 그냥 걷는 거지.' 하긴 내가 집 근처를 산책할 때를 떠올려봐도 그렇긴 해. 산책로가 그냥 산책로지 뭐...

거기서 뻘한 상상을 마무리하려다가 잠깐. 그런데 우리집 앞 산책길도 유심히 보면 매일 조금씩은 다르지 않았던가? 해의 위치가 미묘하게 바뀌고 구름 모양이 다르고 나뭇잎의 색깔이 좀 더 짙어지고 가끔은 비 냄새가 나고 종종 마주치는 강아지가 오늘은 다른 옷을 입고 있고 기타 등등. 어쩐지 머쓱한 마음에 매번 카메라를 들진 않지만 작은 변화를 눈에 담고 몸으로 느끼며 걸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아 뭉뚱그리기 쉬운 것들.

그렇다면 지금 바다 옆을 걷고 있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매일 다른 광안리가 있겠지 싶어졌다. '오늘은 유난히 해가 높네', '날이 흐려서 바다 색이 칙칙하군', '점점 여행객이 많아지네', '저 강아지는 오늘 다른 옷을 입고 나왔네'... 여기 살고 매일 걷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작은 변화를 홀로 눈치채고는 속으로 작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기는 조금 유난인 것 같아 꾹 참으며.

- 광안리 해수욕장 파라솔 아래에 앉아 쓴
2023년 4월 28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열한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오늘 편지는 갭이어를 보내던 작년 4월의 부산 여행에서 쓴 글로 열어봤어요. 마지막 날 아침 일찍부터 광안리 해수욕장을 산책하다가 파라솔 그늘에 앉아서 휴대폰에 토독토독 써 내려갔던 메모랍니다.


바로 이 풍경을 보며 쓴 일기예요


지금까지 갭이어 동안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들을 하나씩 소개해드렸죠. 요리(9화)와 뜨개(10화)에 이어, 오늘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스스로 집순이라고 인식하기 전부터 이미 집순이였던 이른바 내츄럴-본, 타고난 집순이예요.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여행에 큰 흥미가 없었는데 퇴사를 결심하기 1년 전, 그러니까 21년쯤부터 갑자기 여행 생각이 많아졌어요. 길어지는 코로나 때문에 답답했던 것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현실 도피였어요. 눈 떠서 일만 하는 삶에서 며칠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결국 퇴사 후 갭이어를 갖기로 결정하면서 갭이어 버킷리스트에 '여행 자주 가기'를 써넣었습니다. 언제 또 이렇게 시간적 여유와 (퇴직금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생긴) 경제적 여유가 동시에 있겠냐면서요. 그렇게 저는 갭이어 동안 한 달에 한 번 꼴로 여행을 다녔답니다.



그중에서도 제 갭이어에 유달리 진한 궤적을 남긴 건 혼자 떠난 여행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여행을 다녀와서 사람이 바뀌었거나, 대단한 자기 발견을 했거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사실 그런 돌발상황을 즐기지 않아서 애초에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고요.


그럼 혼자 여행을 해서 대체 뭐가 좋았냐고요? '맛있는 거 먹고 멋진 거 보니까 좋았죠 뭐...' 라는 답변을 기대하진 않으실 테니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세 가지 이유를 뽑아봤어요.


이 세 가지는 제가 '혼자 갭이어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기도 해요. 



평일 여행의 해방감을 잔뜩 누리기

'안 하던 걸, 안 하던 공간에서, 안 하던 시간에 하는 것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


이건 제가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던 22년 여름, 짧은 서울 여행을 했던 날 문득 떠올린 문장이에요. 그때로 말하자면 이미 번아웃 신호가 여러 차례 왔지만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하던 시기였어요. 이유 모를 갑갑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반차를 내고 을지로 쪽에 숙소를 잡아 1박 2일 서울 나들이를 했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광화문 광장까지 도착했어요. 이른 아침의 광화문은 사람이 별로 없고 정말 평화롭더라고요. 평일에는 경기도에서 강남으로 출퇴근하고 주말에는 지쳐서 잠들거나 잔업을 하느라 바쁘던 내가 여기에서 멍을 다 때리고 있다니. 낯선 일을 낯선 공간에서 낯선 시간에 하고 있다는 게 그렇게 위로가 됐어요.


내게 이런 게 필요했구나. 이런 순간을 나한테 더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죠. 아직도 그때 광화문 광장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하던 순간이 생생해요. (그리고 이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만났답니다. 네, 제 갭이어의 시작이 된 그 책이요!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여행이죠?)


그런 순간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 갭이어를 가지기로 했으니, 붐비는 주말을 피해 평일에 혼자 훌쩍 떠나는 백수 여행은 그 자체로 제게 해방감을 안겨줬어요. 회사 다닐 땐 꿈도 못 꾸던 일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요.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걷다가 한적한 카페에 앉아있는 것, 한산한 바다를 구경하다가 식당 오픈 시간에 맞춰 일등으로 들어가는 것. 전부 혼자 하는 갭이어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에요.



먹고 자고 걷는 것에만 집중하기

여행에서 하는 일은 사실 단순해요. 먹고 자고 걷는 일의 반복이죠. 다만 여행이 좋은 건 타지에서 뭘 먹을지 생각하고 길을 찾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온갖 번잡한 고민에서 잠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이에요. 무언가 이뤄야 한다는 압박에 짓눌린 '생활자'의 삶에서 벗어나, 그저 잠시 머물다 떠나기만 하면 되는 '관찰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광안리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한가롭게 이런저런 상상이나 한 것처럼요.


그러니 여행의 다른 말은 어쩌면 '환기'가 아닐까 싶어요. 일명 '과몰입 방지!' 코앞의 모니터만 보다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산을 보면 눈이 쉬는 느낌이 들잖아요. 아등바등하며 살다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면 손톱보다 작아진 건물을 보며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다른 지역, 다른 문화, 다른 시각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내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게 무용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해요. 물론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법처럼 뚝딱! 혹은 뿅! 하고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어요.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확률이 더 높죠.


하지만, 고민을 일시정지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의미를 가져요. 먹고 자고 걷는 가장 기본적인 일에 집중함으로써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늪에 매몰되는 걸 방지해주니까요.



내가 여행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관찰하기

여행은 나를 둘러싼 외부를 관찰하는 동시에 나의 내부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에요. 나 자신에게서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게 된달까요? 특히 동행자를 신경 쓸 필요 없는 혼자 여행이라면 내가 여행의 어느 부분을 좋아하는지 가만히 살펴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저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해요. 인물 사진이 아니라 풍경 사진을요.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가방을 열면 손이 바로 닿을 곳에 휴대폰과 카메라를 두고 걷다가, 선물 같은 장면을 사진으로 포착하면 혼자 엄청 기뻐해요. 특히 수평과 수직이 딱 맞고 구도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을 때 희열을 느낀답니다.


또한, MBTI가 J로 끝나는 사람답게 여행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해요. 계획한 일정을 하나씩 해낼 때의 뿌듯함도 좋아하고요. 몇 번의 여행 동안 저는 즉흥 100%보다는 어느 정도의 준비가 바탕이 되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약간의 우연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계획 세우기를 멈추진 않습니다 (ㅋㅋㅋ) 제 템포에 맞게, 그리고 우연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조금 더 느긋하게 계획을 세울 뿐이죠.


'내게 맞는 여행'을 찾아가는 기쁨을 알게 되니 혼자 하는 여행도 금세 좋아하게 됐어요. 이제는 제법 혼자 잘 놀고 잘 먹고 잘 돌아다니는 '혼자 여행 아티스트'가 되었다고 자부한답니다.




오늘 준비한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즐겁게 읽으셨나요?


혹시라도 지치는 하루를 보냈다면 이 편지로 조금이나마 '환기'가 되었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오늘도 편안한 밤 보내시고요.


또 훌쩍 떠나고 싶어진,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은 어떤 여행을 좋아하나요?


저는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고, 오래된 궁을 좋아하고, 그 지역만의 특징이 묻어나는 여행지를 좋아해요. 카페나 식당은 너무 힙하지 않은 곳, 테이블과 의자의 높이가 같지 않은 곳, 우드와 화이트톤의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곳을 좋아하고요.


구독자님의 여행 취향은 무엇인가요? 저처럼 갭이어 중의 여행 이야기 혹은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알려주셔도 좋아요. 댓글에 남겨주시거나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세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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