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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갭이어가 알려 준 뜨개의 세계

'모르는 세계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어른이 된 것 같아'

갭이어를 보내던 중 뜨개질을 시작하고부터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꼭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이식받은 느낌이랄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니트를 살 때는 괜히 패턴을 눈여겨보게 되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뜨개질하는 장면이 나오면 꼭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든다.

봤는데 몰랐던 것의 의미도 새롭게 알게 됐다. 전통적인 선물 클리셰인 '뜨개 목도리'가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의 표현인지, 흔하다 못해 무감해진 '엉킨 실타래'라는 표현이 실제로 겪어보면 얼마나 큰 재앙인지!

'벽난로 옆 안락의자에서 뜨개질하다 잠든 할머니'의 이미지가 영화 속 납작한 장면이 아닌 하나의 생생한 삶이 되어 다가왔다. 어쩌면 내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비록 멋진 벽난로와 안락의자는 없어도, '뜨개질하는 할머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구독자님께 쓰는 열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오늘 편지의 주제는 제가 갭이어 동안 발견한 또 하나의 행복, 뜨개질입니다.


사실 뜨개질은 매년 겨울마다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왠지 내 손으로 뜬 목도리 하나 정도는 가지고 싶었거든요. 일종의 버킷리스트였지만 늘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미루고만 있다가 2022년, 퇴사하고 처음 맞은 겨울에 실행에 옮겼습니다.


처음엔 세트로 구성된 대바늘 목도리 DIY 키트를 구매해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점차 자신감이 붙었고, 매번 사서 쓰던 강아지 장난감을 직접 만들고 싶어 코바늘도 시작하게 됐죠.


도안 by 슬로우모먼츠


이런저런 실을 알아보다가 실 가게도 찾아가고, 유튜브에서 각종 용어와 도안을 찾아보고, 인스타그램에 있는 뜨개 계정들도 팔로우하고, 뜨고 싶은 것을 모아둔 사진첩 폴더가 따로 생기고...


그렇게 갭이어 내내 뜨개 생활을 즐겼고, 갭이어가 끝난 지금도 뜨개질은 제 일상에 없어선 안 될 일부가 되었어요.


대체 왜 그렇게 뜨개질에 빠졌냐고요?


뜨개질이 좋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지만, 고르고 골라서 딱 여덟 가지만 말씀드려 볼게요.



Why I love to knit and crochet

내가 뜨개질을 좋아하는 8가지 이유

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뜨개질에 빠르게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성취감'이에요. 무기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소소한 성취를 여러 개 만드는 거라고 하잖아요. 뜨개질은 완성했을 때 그 결과물이 손에 잡히니 성취감이 크게 느껴져요.

② 창작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오랫동안 제 취미는 뭔가를 보거나 듣는 수동적인 활동 위주였어요. 그런데 뜨개질은 내가 직접 만드는 능동적인 취미라서 색다르더라고요. 창작 욕구가 충족되는 느낌이랄까요? 뭔가를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 자존감이 참 좋았어요.

③ '인간 3D 프린터'가 될 수 있다

'뜨개인들은 인간 3D 프린터다!' 제가 즐겨보는 뜨개 유튜버 중 '바늘이야기 김대리'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기본 기법만 몇 가지 알면 그걸 조합하고 응용해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거든요. 실제로 저도 티슈 커버부터 강아지 장난감까지 사지 않고 만들어서 쓰고 있답니다.

도안 by opsy_loops

④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뜨개의 세계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다채롭고 무궁무진해요. 같은 기법이어도 어떤 실과 바늘을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니 잘 질리지 않죠. 게다가 뜨개 튜토리얼, 뜨개 브이로그, 뜨개 공간까지! 온/오프라인에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넘쳐난답니다.

⑤ 오래된 만큼 영원하다

뜨개의 역사는 정말 오래됐어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뜨개 편물이 무려 11세기 이집트에서 발견된 뜨개 양말이라고 하니 그 역사가 엄청나죠. 그래서 그런지 잠깐 돌고 마는 유행이 아닌,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났다는 어떤 안정감이 뜨개질에는 있어요.

도안 by SEVY 쎄비

⑥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다

저는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좋아해서 뜨개질도 홀로 하길 즐기지만 그렇다고 내향인만의 취미는 아니에요. 여러 명이 모여서 함께 수다 떨며 뜨개할 수도 있거든요! 혼자 하고 싶은 사람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즐길 수 있어요.

도안 by 바늘이야기

⑦ 만들어서 자랑할 수 있다

뜨개질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인 만큼 주변에서 '잘 만들었다'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더 좋겠죠? 그래서 저는 요즘 일부러 제가 뜬 옷을 입고 나가요. 기성복인 척 가만히 있다가 '사실 이것도 제가 뜬 거예요!' 하고 말하고 놀라는 반응을 즐긴답니다 (ㅋㅋㅋㅋ) 간단히 만들 수 있는 키링이나 책갈피를 선물하는 것도 좋아해요.

도안 by 바늘이야기

⑧ 사람마다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

전 세계 수억 명이 뜨개를 하지만 아마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씩 다 다를 거예요. 예를 들어 뜨개질은 힐링이라고 하며 천천히 뜨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반복 동작을 빠르게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만큼 다양하고 깊은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에요.



어떤가요? 거의 뜨개에 대한 러브레터 수준이죠?


꼭 뜨개가 아니어도 좋아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을 내 곁에 두는 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번아웃을 겪었거나, 갭이어를 가지고 있는 중이라면 더욱이요.


저는 갭이어 동안 '일이 아닌 것을 통해서 내 존재를 발견'하는 경험을 했어요. 산책, 뜨개질, 요리, 여행처럼 커리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활동들을 하면서 소소한 성취감을 느끼니 일이 내 전부가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거든요.


일에 매몰되지 않아도,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심지어 그동안 해왔던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더라도 나를 지탱해 줄 다른 것들이 있음을 발견한 게 갭이어의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그러니 구독자님께도 이렇게 구구절절한 러브레터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이 하나쯤 있기를 바라요. 그게 사람이든 반려동물이든 운동이든 취미든 무엇이든요!


혹시 이 편지를 읽고 '나도 뜨개해 볼까?' 하는 마음이 살짝 생겼다면, 제가 떠봤던 것 중에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코바늘 도안을 아래에 추천할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해 보세요.


'도안 by OO'를 누르면 원본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하도록 연결해 뒀어요!



for crochet beginner

초보에게 추천하는 코바늘 뜨개 무료 도안 4가지

전선 커버 도안 by 나방이네꼼작소

코바늘 뜨개질의 가장 기본 기법인 '짧은뜨기'만으로 못생긴 충전기 선을 가릴 수 있어요.

네잎클로버 도안 by 코바늘뜨개사 홀리

코바늘 기본 기법 중 '한길긴뜨기'를 연습하기 좋아요. 키링으로 만들어 선물하기 딱! 

태블릿 파우치 도안 by 튤리피니

마찬가지로 짧은뜨기만 반복해서 태블릿 파우치를 만들 수 있어요. 두꺼운 실로 뜨면 더 좋아요.

체커보드 티코스터 도안 by 선양

역시 한길긴뜨기만 하면 되지만, 배색 실을 바꿔가며 뜨는 게 조~금 어려울 수 있어요. 뜨개질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 도전하길 추천!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오늘로 열 번째인 <나의 갭이어 일기>는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 다시 열 번의 편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남은 과정까지 함께해 주시길 바라며,

그럼 이만 줄일게요.


반환점을 돌면서,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이 최근에 만난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요?


마스다 미리의 책 <주말엔 숲으로>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뭔가, 모르는 세계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어른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어렸을 때 본 어른들은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았는데 막상 제가 어른이 되어 보니 몰랐던 세계가 끊임없이 나타나더라고요.


제게 뜨개질이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듯, 구독자님이 최근 알게 된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요. 댓글에 남겨주시거나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세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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