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정'의 즐거움
무기력에는 작더라도 성취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일어나면 이불 정리하기' '귀찮아도 샤워하기' '창문 열어서 환기하기' 처럼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가속도가 붙어서 늪 같은 무기력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해진다. 보잘것없는 작은 성취가 모여서 일상을 살도록 한다.
내게는 요리가 그런 작은 성취 중 하나였다. 낯선 채소를 고르고, 새로운 식단을 짜고, 채소가 도착하면 깨끗하게 손질하고, 스크랩해 둔 레시피를 켜 놓고 요리하고, 구도를 고심하며 사진을 찍고,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까지 하는 일.
나에게 요리를 해 먹이고 치우는 모든 과정이 진심으로 즐거웠고 성취감을 느꼈다. 심지어 너무 매진한 탓에 삼시 세끼만 해 먹었을 뿐인데 하루가 다 지나간 날도 여럿 있었다.
그래도 침대에만 누워있다 자책하며 잠드는 것보다는 훨씬 긍정적인 변화였다. 나를 잘 먹이기만 해도 충분했던 시간.
만사가 귀찮을 땐 여전히 배달 앱에 손이 가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열심히 해 먹으려 노력했던 이 시간 덕분에 길고 어두운 겨울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구독자님께 쓰는 아홉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갭이어를 보내는 동안 '몰랐는데 나 이런 것도 좋아했구나?' 하는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됐다고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렸죠. 오늘은 그중 하나인 '요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회사에 다닐 땐 밖에서 사 먹는 일이 많았지만, 퇴사하고 나니 요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집순이니까 지금부터 집에만 있을 건데, 돈을 아껴야 하는 백수가 매끼 배달을 시킬 순 없으니 결국 집에서 삼시 세끼를 직접 챙겨 먹어야 했죠.
다행히 요리를 싫어하거나 아예 못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간단한 볶음밥, 파스타 정도는 충분히 제 입맛대로 만들 수 있는 정도? 하지만 제 요리 경험은 딱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다룰 수 있는 재료의 폭이 정말 좁았거든요.
혹시 구독자님도 장을 볼 때 뭘 사야 할지 몰라 매번 먹는 것만 담지 않나요?
저는 특히 채소를 고를 때 아주 소극적이었어요. 낯선 채소는 어떻게 해 먹어야 할지 몰라서 늘 가장 만만한 것들만 고르고 말았죠. (보통 샐러드채소, 토마토, 오이 이 세 가지가 단골이었어요.) 좁디좁은 제 요리 경험으로는 늘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레퍼토리만 반복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갭이어를 시작하고 네 달쯤 되던 때 SNS에서 채소 구독 서비스 '어글리어스'를 알게 됐어요. (광고 아닙니다!)
어글리어스는 못생겼거나, 공급량이 과다하거나, 판로를 찾지 못해 버려질 위기에 처한 친환경 채소를 소량으로 다양하게 구성해 배송해 주는 서비스예요.
1~2인용과 3~4인용으로 채소 양을 선택할 수 있고, 매주 업데이트되는 열 가지 내외의 채소 리스트 중에서 내가 싫어하는 건 빼고 좋아하는 건 양을 늘릴 수 있어요. 배송 주기도 1주, 2주, 3주 중에서 내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고요.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가격은 달라지지만 보통은 2만 원이면 1인 가구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더라고요. 요즘 치킨 한 마리 가격이 2만 원인 걸 생각해 보면 꽤 저렴한 편이에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다양한 재료를 반강제적으로(!) 만나며 식단이 다양해지고 재료 경험이 넓어진다는 점이었어요. 채소마다 손질 및 보관법, 보관 가능한 기간, 활용할 수 있는 레시피 정보가 제공되기 때문에 낯선 채소와 친해지기 정말 좋거든요.
그래서 저도 채소박스를 구성할 때마다 생소한 채소 한 가지는 의식적으로 꼭 포함하려 노력했어요. 덕분에 애호박, 당근, 쑥갓, 루꼴라, 래디쉬, 청경채, 바질까지! 다양한 채소를 제 손으로 만지고 요리할 수 있었죠.
샐러드채소 - 토마토 - 오이 무한루프만 돌던 제게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셈이에요.
매주 식단을 짜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번 주에 배송 올 채소 품목이 정해지면 레시피를 검색하면서 매주 저만의 식단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특히 어글리어스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레시피는 따라 하기 쉬우면서도 실패하지 않는 메뉴들이 많아 정말 유용했어요.
지난 6화 '갭이어 생활자의 하루 루틴' 편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서 갭이어를 시작하긴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니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했었죠.
어글리어스를 구독하고 요리를 시작한 게 바로 그쯤이었는데요. 이렇게 식단을 짜고 하나씩 만들어 먹다 보니 꼭 미션을 달성하는 것 같은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에게 무엇이든 '할 일'을 부여하는 게 갭이어 기간에 참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때 썼던 일기들을 다시 살펴보면 거의 다 끼니를 만들어 먹은 이야기예요.
2023년 2월 28일
아침으로 당감주스랑 샌드위치 만들어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특히 당감주스!! 당근이 이렇게 맛있다니 말도 안 돼... 내일 또 해 먹어야지.
2023년 3월 14일
무 소진을 위해 유튜브 검색해서 쌈무절임을 만들었다. 식초 설탕 소금 맛술 와사비를 물에 잘 풀어서 얇게 썬 무에 부어주기만 하면 끝!! 여기에 레몬 한 개도 다 넣어봤는데 맛있었으면.
2023년 3월 17일
아침에 배추, 봄동, 시금치 탈탈 털어서 된장국 한솥 끓였다. 된장국을 내 손으로 만든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맛있었다.
2023년 5월 5일
바질을 받았는데 보관법을 검색해 보니 냉장고에 그냥 보관하면 냉해를 입는다고 해서 후다닥 토마토바질청을 만들었다. 이거 하려고 난생처음 유리병 열탕소독도 해봄!
이전에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결과물이 빨리 나오는 것만 찾았어요. 느긋하게 밥 먹을 여유조차 없으니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치우는 모든 과정은 번거롭게만 느껴졌죠.
하지만 갭이어를 가지고 요리를 시작하면서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정의 즐거움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요리의 목표는 물론 맛있는 음식이라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겠지만, 저는 그보다 '과정'에서 더 즐거움을 느꼈거든요. 토마토바질청을 만들어 담기 위해 유튜브에 열탕소독 하는 법을 검색해서 난생처음 유리병을 소독해 본 것처럼요.
낯선 재료를 과감히 고르고 레시피를 찾아보고 실행해 보는 것. 그것에서 얻은 작은 성취감.
끼니를 만들어 먹는다는 건 생존에 필요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는 일임을 온몸으로 체감한 시간이었어요.
이야기 나온 김에, 제가 만들어보고 맛있었던 레시피를 추천해 볼게요. 참고한 레시피 출처를 모두 달아둘 테니 마음에 드는 메뉴가 있다면 저장해 뒀다가 따라 해 보세요!
프랜의 추천 레시피
알배추들기름파스타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646
· 채소박스를 받고 가장 처음 해 먹은 것. '채소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충격받았던 음식이에요.
쑥갓무침
· 레시피 : https://youtu.be/KRFnNb4MwUs
· 쑥갓 양이 많아서 처리를 고민하다가 알게 된 레시피. 양파와 함께 소스에 절여두면 고기 먹을 때 하나씩 집어먹기 좋아요.
단호박계란찜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425
· 치즈만 올리고 아무 간 안 했는데도 짱맛...
차돌박이채소찜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775
· 사실상 차돌박이는 거들 뿐이었던 채소찜. 레시피의 간장소스가 특히 맛있어요.
시금치베이컨토스트
· 레시피 : 어글리어스 레시피 페이퍼
· 볶은 시금치와 베이컨을 올린 토스트. 어글리어스 채소박스에 동봉된 레시피 페이퍼를 보고 만들었는데 비주얼이 마음에 들었어요.
무조림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26
· 고기 한 점 안 들어갔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이걸 내가 했다니?! 믿기지 않았던 맛.
고구마파이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8
· 식빵으로 만들어서 간편했고 계란물 바르는 과정이 소꿉놀이 같아서 재밌었어요.
토마토샐러드파스타
· 레시피 : https://uglyus.co.kr/recipes/18
· 토마토 하나를 통으로 마리네이드하는 색다른 레시피!
이외에 알게 된 자잘한 팁
당근 불호단이 당근을 먹는 법
저는 당근을 정~말 싫어하지만 당근라페는 좋아해요. 한 번 만들어두면 쫄면, 샌드위치, 김밥 등 여기저기 다 넣을 수 있어 활용도가 높아요.
아낌없이 주는 레몬
레몬을 잘라서 얼려두면 음료나 하이볼에 하나씩 넣어 먹기 좋아요. 혹은 레몬즙을 짜서 달지 않은 홈메이드 레모네이드를 해 먹어도 되고, 레몬즙을 짜고 남은 껍질은 주방 청소에 사용해요!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즐겁게 읽으셨나요? 쓰다 보니 너무너무 배고파지네요.
구독자님도 맛있는 과정이 담긴 한 상을 나에게 대접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랄게요.
그럼 오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내일 아침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께서 최근 요리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유튜브에서 보고 따라 했는데 맛있었던 레시피도 좋고, 나만의 비장의 레시피도 좋아요. 다른 분들은 어떤 식재료로 어떤 요리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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