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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인생의 기본값은 불행이고 행복은 도착점이 아니니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 충분히 자고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깨기, 방금 막 건조를 마친 포근한 수건, 전날 설거지해두고 밤새 바싹 마른 그릇, 밥상 차리고 사진 찍기,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라디오 소리, 방 안에 드는 햇살, 한 달에 한 번 엽서존 다른 테마로 꾸미기, 무엇이든 제자리에 차곡차곡 정리하기, 바이닐 재생 전 몇 초간의 작은 잡음, 푹 자고 나서 따끈해진 강아지의 체온.

- 2023년 3월 15일 일기에서


설거지를 하며 든 생각 - 설거지를 좋아해. 웬만하면 다음 날로 미루지 않아. 설거지가 주는 작고 확실한 성취감. 흔히들 '해도 티 안 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일상이 흔들리는 일.

사람마다 설거지 방법도 다르려나? 시행착오 끝에 찾은 나만의 방법 몇 가지 : 기름기 있는 것과 물로만 씻어도 되는 것이 겹치지 않게. 큰 접시부터 작은 접시 순으로, 냄비와 수저는 제일 마지막에 헹구기. 싱크대 주변에 튄 물을 닦고 행주까지 빨아서 널어야 진짜 설거지 끝.

- 2023년 4월 7일 일기에서


최근 하루에 한 번씩 짧게라도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정말 움직이길 싫어하는 사람인데, 왜 우울증에 산책을 권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부유하는 듯한 우울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랄까.

내 체력과 호흡으로 걸음을 옮기고
온몸으로 바람과 하늘과 냄새를 느끼고
발바닥으로 땅을 딛고
뻐근한 근육을 움직이는 물리적인 과정이
 
비록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답을 내리지 못해 방황하고 있지만, 산책하는 순간만큼은 그 답과는 상관없이 그저 지금 내가 실존하고 있다는 감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곧 위안이라는 걸 실감한다.

앞으로 영영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여기 한 명의 사람으로 존재할 거라는 위안.

- 2022년 10월 11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여덟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은 일기장을 뒤적여서 서로 다른 날짜에 쓴 일기 세 편을 가져와 봤어요.


언뜻 보기엔 아무 연관 없는 파편들 같지만 나름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갭이어를 갖는 동안 '일상에서 발견한 행복의 순간'에 적었다는 점이에요.



여기서 잠시,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심오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인생의 행복에 대한 제 생각, 그러니까 제 인생관은 몇 년 전부터 아주 확고해요. 바로 '인생의 기본값은 불행이며, 행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이에요.


7년 전쯤 제게 나쁜 일이 한꺼번에 생긴 적이 있어요. 연이은 불행에 괴로워하다가 문득 처음 생각했죠. 어쩌면 삶 전체가 원래 불행일지도 모르겠다고. 매일의 불행 속에서 우리는 운 좋게 가끔 행복을 마주치며 살아갈 뿐이라고요.


너무 비관적인 것 같나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오히려 조금 더 수월해요.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불행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행복하지 못한 나의 모습'에 너무 괴로워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을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어쩌다 찾아온 행복을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이런 제 생각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영화가 있어서 함께 소개하고 싶어요. 바로 2021년에 개봉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소울 (Soul)>인데요.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썼던 감상평을 공유해 볼게요.




잠깐!

아래 감상평에는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어요. 아직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언젠가 볼 예정이라면 사진 아래의 박스 부분은 스크롤을 빠르게 내려 스킵하시길! 스포일러 없이 볼 때 더 좋은 영화예요.
'행복은 삶이라는 기다란 선을 이루는 점선.'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 목표의 성패에 집착하게 된다. 그 일을 해내지 않으면 나는 평생 불행할 것 같고, 실패한 인생인 것 같고. 하지만 행복은 결코 목표나 결과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목표를 이뤘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지도 않는다. 삶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클라이막스에 올라선 순간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최고의 성공을 거둔 날에도 우리는 평소처럼 지하철을 타고 평소처럼 집에 들어가서 평소처럼 씻고 평소처럼 잔다. 가장 극적인 순간에서 컷이 전환되는 일 따위 없이 우리의 삶은 그저, 성공에도 실패에도 상관없이 연속될 뿐이다.

그러니 행복은 어떤 화살표의 끝에 있는 도착점이 아니다. 그저 삶이라는 기다란 선을 이루는 점선이다. 그 길을 걸으며 주의 깊게 바라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 매번 마주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 것. 때로는 드문드문 이어지고, 때로는 꽤 촘촘하게 이어지기도 하는 점선.

다시 말해 행복은 그저 과정이다. 이어지는 삶을 따라가다 문득 마주치는 것들이다. 좋아하는 가게에서 식사하기,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취미를 즐기기, 바람 냄새를 맡기, 떨어지는 낙엽을 보기, 도도도 산책하는 강아지와 마주치기, 바다에 발을 담근 채 파도의 오고 감을 느끼기.

이런 것들을 겉의 결과로만 본다면 보잘것없고 한심하겠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소한 감각이 지금의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 2021년 1월 30일, 영화 '소울'을 보고




저는 이 영화를 보다가 펑펑 울 정도로 감동했어요. 행복은 어떤 정해진 모양의 성과가 아니라, 연속될 뿐인 시간 속에서 어쩌다 하나씩 보석처럼 발견되는 순간이라는 걸 영화를 보며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 먼 훗날 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나를 포기하는 건, 적어도 제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에요. 애초에 행복은 도착점이 될 수 없는 데다가 먼 훗날의 나는 분명 또 어떤 이유로든 불행할 테니까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소한 순간을 조금 더 눈여겨보고 조금 더 많이 발견하고 그것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게 내게 더 맞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 갭이어 이야기로 돌아와서, 갭이어를 시작하고 좋았던 점은 그런 나만의 행복한 순간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늦을까 봐 초조해하며 버스 도착 시간을 연신 확인하고, 환승역에서는 옆에 선 사람들과 경쟁하듯 발길을 재촉하고, 일이 바빠 점심시간에도 노트북을 펼쳐 놓은 채 식사를 하던, 늘 2배속 빨리 감기로만 살던 삶을 최초로 슬로 모션으로 재생한 느낌이랄까요?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마저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느릿한 시간을 보낸 덕에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오래도록 붙잡고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맞아, 나 이런 거 좋아했지!' 하며 잊고 있던 행복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 '몰랐는데 나 이런 것도 좋아했구나?' 하는 것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답니다.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잘 읽으셨나요?


다음 편지부터는 '몰랐는데 나 이런 것도 좋아했구나?' 중에서 '이런 것'을 하나씩 소개해보려고 해요.


요리, 뜨개, 여행 총 세 가지인데요. 제가 갭이어 동안 이 친구들을 왜 좋아하게 됐고 어떻게 즐겼는지, 구독자님도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에 대해 적을 예정이에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 벌써부터 신나네요!

우선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구독자님만의 행복과 함께하는

충만한 밤 보내시길 바라요.


편지를 부치는 행복을 만끽하며,

프랜 드림.




신.

구독자님을 행복하게 하는 사소한 것은 무엇인가요?


앞서 2화에서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다만 그땐 일과 관련한 질문이었다면, 오늘은 일이 전혀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아 알려주셨으면 해요.


'하루 일과 끝에 마시는 맥주'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매주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구독자님만의 소소한 행복의 순간을 댓글에 남겨주세요. 혹은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셔도 좋아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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