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갭이어 동안 어떻게 먹고 사냐고요?
퇴사하고 갭이어를 가지며 쉬겠다고 선언했지만 머리가 조금 식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가 고민으로 다가왔다. 4년 동안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아온 내가 '수입 없는 삶'을 얼마나,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난주 퇴사 면담 중 몇 달만 더 일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연말 목표 달성을 위해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이해는 갔다. 하지만 당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 주말 내내 고민하고, 그래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오늘 아침 출근 전에 책상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정확히는 통장 잔고와 지출 계획을 확인했다.
먼저 두 달 후에 떠날 여행. 다행히 대부분의 경비는 이미 지출했고, 남은 금액은 가지고 있는 비상금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더 몇 달 뒤에도 큰돈이 나갈 일이 있지만 그건 모아 둔 저축과 퇴사 후 받을 퇴직금 중 일부를 쓰면 된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남은 퇴직금으로 아무리 못해도 6개월은 생활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거면 됐다. 만약 그 이후에도 갭이어를 이어가고 싶다면 그때의 내가 아르바이트든 뭐든 하겠지.
일을 하지 않고도 최소한 반년의 갭이어(정확히는 갭먼스)를 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자 수입이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물론 몇 달 더 근무하면 통장 잔고는 조금 더 여유 있겠지만, 당장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은 내 상태를 더 돌보기로 했다. 막상 돈은 큰 문제가 아니라면 지금 그만둬도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 2022년 9월 26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일곱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 편지의 주제는 딱 한 글자. '돈'입니다.
갭이어의 한가로움과 행복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냉철한 돈의 세계, 지갑 사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실제로도 많은 분들이 '갭이어 동안 어떻게 먹고 사느냐'에 대해 궁금해하실 테고요.
돈은 퇴사를 할까 말까, 갭이어를 할까 말까, 갭이어를 한다면 얼마나 길게 할까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유쾌하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저도 처음 갭이어를 마음먹은 건 번아웃과 진로 고민 때문이었지만 결국 제일 마지막에 확인 도장을 찍은 건 돈이었거든요.
특히 당분간 어떤 형태로도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지갑 사정을 직면하는 게 더욱 중요했습니다. 제 갭이어 예산은 저축해 둔 돈과 퇴사 후 받을 퇴직금이 전부였으니까요. 내가 가진 돈이 향후 몇 달 동안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할지 확인이 필요했어요.
당시에 제가 퇴직금을 예상해보고 지출 계획을 세운 과정을 공유해 보려고 해요. 퇴직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며 생활했는지도 최대한 솔직하게 적어 볼 테니, 퇴사나 갭이어를 고려하고 있다면 참고할 만한 경험담이 될 거예요.
1. 퇴직금 예상하기
저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갭이어를 계획한다면 퇴직금을 까먹으며 지내야 하죠. 네이버에 '퇴직금 계산기'를 검색하면 대략적인 금액을 확인할 수 있어요. (저는 여기서 계산했던 것보다 실제 수령액이 조금 더 많았어요.) 이 퇴직금과, 회사 다니는 동안 저축한 것, 그리고 마지막 근무 월에 해당하는 월급을 모두 합한 게 나의 갭이어 예산이 되겠죠.
2. 우선 지출할 큰 금액 확보하기
그다음엔 가까운 미래에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큰돈이 나갈 일을 미리 체크해요. 저는 퇴사 직후 예정해 둔 여행이 있어서 거기에 들 여행 경비를 확인했어요. 당장 큰돈 나갈 계획은 없어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정 금액을 비상금으로 빼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3. 현재 지출 패턴 확인하고 조정하기
1에서 2를 빼고 남은 금액이 나의 소중한 갭이어 생활비예요. 무업, 무소득 예정이라면 평소 생활비 지출 패턴이 갭이어 지속 기간을 결정하죠. 저는 평소 지출 항목을 아래와 같이 4가지 그룹으로 나누고 조정했어요.
고정생활비 : 통신비, 보험료, 청약, OTT 구독
고정된 금액이 매달 자동이체되는 항목들로, 이 중에서 유지할 것, 금액을 줄일 것, 아예 해지할 것을 확인해요. 저는 OTT를 많이 정리했어요. 자주 안 보는 건 결제를 중단하고, 자주 보는 건 유지하되 가족 계정을 함께 사용하거나 구독료 무료 혜택이 있는 요금제로 갈아타는 식으로요.
반고정생활비 : 식비, 문화생활 및 덕질
금액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필수 항목들이에요. 수입이 없다고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기만 하면 삶의 윤택함은 사라지겠죠. 갭이어는 나를 위한 시간인 만큼 마냥 다 줄이기보다는 적정 예산을 편성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요. 식비 월 20만 원, 문화생활 및 덕질 (영화, 책, 바이닐, 필름카메라, 뜨개용품 등) 비용은 월 15만 원으로 정하고 이 안에서 쓰는 건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어요.
줄일 수 있는 생활비 : 교통비, 꾸밈, 생활잡화
반면에 줄여도 상관없는 항목도 있었어요. 집순이라 대부분 집에만 있을 테니 우선 교통비가 줄어들 테고, 옷이나 화장품도 더 안 사게 되겠죠. 인테리어 소품 같은 생활잡화는 꼭 필요하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풀려고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건 확 줄이기로 했어요. 이미 집에 뭐가 많으니 갭이어 동안은 더 사지 말자고 생각했죠.
예상외로 발생할 수 있는 생활비 : 교육, 여행, 건강
당장은 빈도와 금액을 예상하지 못하지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항목에는 약간의 플러스알파 예산을 확보해 둬요. 듣고 싶은 클래스가 생길 수 있고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갑자기 아플 수도 있으니 10~15%의 여유 금액을 월 생활비에 포함했어요.
4. 최대 갭이어 기간 가늠하기
이렇게 책정한 월 생활비로 전체 예산을 나누면 갭이어를 유지할 수 있는 최대 기간이 나오겠죠. 저 같은 경우는 안 아끼고 쓰면 6개월, 조금 더 아끼면 10개월까지는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어요. 실제로 2022년 11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총 8개월 동안 갭이어 생활을 했으니 대충 비슷하죠?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제가 무슨 엄청난 자산 컨설턴트처럼 말한 것 같은데 (??? : 딱히 그렇지는...) 물론 실제 지출 내역은 계획과는 조금 많이 달랐습니다.
갭이어 기간 중 실제로 가장 지출 비중이 많았던 항목은 여행, 생활잡화, 식비였어요.
1위 : 여행
10~15%로 예산을 잡은 게 무색하게도 훨씬 웃도는 비중이죠. 8개월 동안 길고 짧은 여행을 총 7번 다녀왔으니 거의 매달 여행한 셈이에요. 여행하는 동안 숙소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게 큰 이유이기도 해요.
2위 : 생활잡화
줄이겠다고 해놓고 2위를 차지하다니! 갭이어 중 단일 지출로는 가장 큰 금액이었던 노트북 구매 때문이에요. 그래도 그 노트북으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으니 결국은 좋은 투자였다고 주장해 봅니다...
3위 : 식비
회사 다닐 땐 아침은 걸렀고 점심 저녁은 식대가 지급되니 몰랐는데 퇴사 후 집에서 세 끼를 다 챙기니 식비가 더 들더라고요. 한동안 요리에 매진하기도 했고, 사실 배달도 많이 시켰고요... 확실히 배달은 좀 줄이면 좋았을 것 같아요.
비록 실제 지출은 계획과 다르더라도 갭이어 시작 전 지갑 사정을 면밀히 살핀 건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어요.
퇴사 확정 전 마음이 흔들리거나, 갭이어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가늠할 때 통장 잔고와 지출 계획을 확인함으로써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아름답진 않아도 꼭 한 번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쓴 편지 중 가장 현실적인 내용이라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변함없이 편안한 밤 보내세요.
오늘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이 갭이어 중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출은 무엇인가요?
무언갈 보거나 소장하길 좋아하는 타고난 덕후인 저는 문화생활과 덕질 비용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제 일상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거든요.
구독자님에게도 '나는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하는 지출 항목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해요. 댓글에 남겨주시거나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세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