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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갭이어 생활자의 하루 루틴

어차피 매일 여행자로 살 수 없다면 생활자가 되어야 했다

아침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알람 없이 깬다. 이불에서 몸만 쏙 나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라디오 켜기. 머리카락을 빗은 다음 화장실에 들어간다. 씻고 나오면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아까 대충 내버려둔 이불을 좋게 펼친다. 조금 있다 다시 눕더라도 일단은 정리한다.

그다음엔 주방에서 물을 마시면서 어제 저녁에 설거지하고 엎어 둔 그릇들을 제자리에 넣는다. 다음은 빵이나 시리얼로 간단한 아침 차려 먹기. 좋아하는 유튜브나 예능을 틀어놓고 가능한 한 천천히 아침 시간을 즐긴다. 다 먹고 나면 그릇을 개수대에 넣어놓고 바로 양치를 한 뒤 웬만하면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는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아홉 시에서 열 시 정도. 이제 책상에 앉아서 '오늘의 할 일'을 한다. 요즘은 블로그에 밀린 여행기를 써서 올리거나 가벼운 온라인 클래스 몇 가지를 들어보는 중. 점심을 간단히 먹고, 또 짧게 한두 시간 정도 할 일을 마저 하다가 되도록 네 시 전에 마무리한다. 그때부터는 자유시간. 대체로 뭘 보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뭘 보면서 뜨개질을 한다. 그러다가 해가 지기 전 다섯 시쯤 얼른 산책을 하고 온다. 가능한 10분이라도.

돌아와서 여섯 시쯤 저녁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한다. 그러고 나면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 침대 옆 조명 하나만 켜 놓고 뒹굴뒹굴하며 TV를 보며 또 뜨개질을 하다가 되도록 열 두시 전후에 잔다. 매일 이러진 않겠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이게 제일 편안하고 맘에 드는 하루.

- 2023년 3월 2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여섯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지난 편지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여섯 번째 편지부터 Part 2가 시작됩니다.


Part 2의 시작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가장 먼저, '갭이어 중인 백수는 하루를 대체 어떻게 보내나' 하는 궁금증을 풀어 보고자 당시 하루 루틴을 적은 일기를 가져와 봤어요.


사실을 고백하자면, 제 갭이어 초반엔 루틴이랄 게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눈앞에 놓인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헤매기 바빴죠. 4년 동안 방학 없는 직장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커다란 공동(空洞)과도 같은 시간을 마주하니 덜컥 두려움이 들 정도로 막막했어요.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 갭이어를 시작하고 첫 두 달 동안은 여행 - 휴식 - 여행만 반복했습니다. 2주 여행 후 돌아와서 2주 쉬다가 또 금방 훌쩍 떠나는 식으로요. 하지만 그렇다고 갭이어 내내 여행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여행하는 시간'도 '여독을 푸는 시간'도 아닌 '그냥 하루'는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여행 욕구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고부터는 꼭 정해진 수순처럼 길고 지독한 무기력이 찾아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멍하니 있다가 다시 스르륵 잠들기 일쑤였고,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날도 많았고요. 물론 어차피 쉬는 시간이니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내 자유지만, 문제는 이 상태가 꽤 길게 지속되면서 점차 밀려오는 불안감과 무력감이었어요.


퇴사 전에 나름 야심 차게 계획한 것들이 있었어요. 방치했던 블로그 다시 시작하기, 관심 있는 주제의 온라인 클래스 찾아서 듣기, 생각만 하던 글쓰기 꾸준히 해 보기, 앞으로 무슨 일로 먹고 살지 고민도 해 보기 등등. 하지만 한가득 적어 둔 버킷리스트가 민망하게도 저는 모든 걸 구석으로 밀어두고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습니다. 그런 나를 보며 여러 번 실망하고 한심해하고 자책했죠.


어차피 매일 여행자로 살 수 없다면 생활자가 되어야 했어요. 매일을 비일상으로 살 수 없다면, 갭이어 안에서도 나름의 반복적인 일상을 만들어야 했죠.


그럴 때 도움이 된 게 바로 '루틴'이에요.



제가 말하는 루틴은 대단한 게 아니에요. 앞선 일기에서 보셨듯이 머리 빗기, 씻기, 창문 열기, 이불 정리하기 같은 것들이죠. 예전엔 분명 숨 쉬듯이 쉽게 하던 일들이지만 무기력한 몸과 마음으로는 이것조차 해내기 어려웠거든요. 꼭 걸음마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하나 다시 일상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다행히 조금씩 천천히 루틴이 잡혀갔고, 그렇게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자 제게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냥 미루기만 하던 일들을 드디어 하나씩 해 볼 마음이 들기 시작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번아웃을 겪는 동안 제 마음의 근육이 다 빠져버렸던 것 같아요. 머리는 분주하게 할 일을 나열해 대는데, 이미 한차례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음은 그걸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거죠. 당장 걸을 수도 없는데 왜 뛰지 못하냐고 급히 재촉했던 셈이에요.


루틴은 그렇게 약해진 마음에 다시 근육을 붙여주는 일이었어요. 나를 지탱하는 일상이 있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할 의욕도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혹시 저처럼 갭이어 중 무기력에 빠졌다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제 나름의 몇 가지 팁을 짧게 공유해 볼게요.


1. 'A를 하면 B를 하고 B를 하면 C를 한다' 식으로 만들어 보기

일어나면 머리를 빗는다. 머리를 빗고 나면 씻는다. 씻고 나면 로션을 바른다. 로션을 바르면 창문을 연다. 이렇게 행동끼리 연결지어 생각하면 연쇄적으로 실행하기 쉬워요.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끼리 묶어서 배치해 보세요. 


2. 루틴을 반복할 힘이 부족하다면 앱의 도움 빌리기

루틴을 잡으려던 초반에 '루티너리'라는 앱을 사용했는데 꽤 도움이 됐어요. 설정해 둔 루틴에 맞춰 알림이 오고 타이머를 통해 실행을 유도해 줘요. 특히 저는 아침에 유용하게 썼어요. 아침 루틴만이라도 다 하고 나면 '적어도 오늘 하루가 아예 망한 건 아니다' 라는 나름의 작은 성취감이 생기거든요.


3.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지 모르겠다면 이런 것들을

시간에 맞춰 끼니 챙기기 : 끼니는 식사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개념이기도 해요. 끼니를 시간에 맞게 챙기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하루 전체가 규칙적으로 재편되고, 반복할 수 있는 리듬이 자연스럽게 생겨요.

내게 할 일을 부여하기 :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오늘 할 일을 정해봐요. 생산성 있는 활동이면 좋지만 사실 아니어도 상관 없어요. 갭이어 자체가 생산성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지 아닌지에만 집중해서 하루를 채워도 충분해요.

하루 한 번 산책하기 : 정말 할 게 없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으니 산책만큼은 꼭 넣어 보세요. 하루 한 번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무력감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거든요. 실제로 제가 효과를 느낀 방법이에요.


4. 루틴이 늘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무엇보다 루틴이 365일 늘 같아야 한다는 강박은 갖지 않길 바라요. 조금씩 유동적이어도 상관 없어요. 사람은 하다못해 계절만 바뀌어도 큰 영향을 받곤 하잖아요. 여름엔 새벽부터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저절로 떠지지만 겨울엔 아침에도 어두컴컴해서 일어나기 힘들듯이요. 그럴 땐 같은 루틴을 무리하게 고집하기보다는 유연하게 조정해 보세요. 겨울에는 기상 시각을 조금 늦추는 대신 산책은 해가 떠 있는 점심에 일찍 하고, 할 일을 저녁까지 조금 더 하다가 늦게 자는 식으로요. 



저는 루틴의 핵심은 '늘 똑같다' 보다는 '한다'에 있다고 생각해요.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에서 서핑하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왼쪽 팔을 더 높이 들든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더 싣든, 어찌 됐든 중요한 건 흔들리는 매일 위에서도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실 종종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진대도 괜찮아요. 서핑보드 위로 다시 올라갈 힘도 루틴으로부터 생길 거예요.




이번 편지는 여기까지예요. 흥미롭게 잘 읽으셨나요?


갭이어를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거나, 무기력에서 헤매고 있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편지였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불안보다는 기대로 가득찬 밤을 보내시길 바라며.


출렁이는 매일 위에서,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의 하루 루틴은 어떤가요?
루틴을 새로 만든다면, 내 하루에 끼워 넣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했듯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꼭 라디오부터 켜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에 늘 라디오가 켜져 있어서 이제는 라디오 소리가 없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은 느낌이거든요.


구독자님의 하루 루틴에도 꼭 빠지지 않는 것 혹은 새롭게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제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에 남겨주세요. 혹은 구독자 전용 익명 방명록에 적어 주셔도 좋아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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