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서 병원을 찾다
심각한 수준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지난해 5월, 새로운 직장에 이직을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직을 생각했다. 낯선 환경에서 경력 계약직이 경험한 이곳은 내게 빠른 시간 내에 그들과 같은 수준의 업무 처리를 바라고 있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래도 배워간다 생각을 했고 다행히 잘 챙겨주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전부가 그런건 아니다.
많은 걸 알게모르게 알려주시던 조직의 장은 본인 커리어를 위해 파견을 떠났고, 올해 새로운 분이 오셨다. 서로가 처음이니 당연히 신뢰가 없었다. 난 나름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나의 최선의 행동이 타인에게 평가의 잣대로 보면 형편없었나보다. 나를 대하는 언성이 높아졌고 한숨이 시도때도 없이 나왔고 밀착관리 대상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내 지난 사회생활 경력이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부정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2월의 마지막 날. 그 분과 업무현황을 보고하면서 내 말이 자꾸 컷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다음 날 여자친구와 영화관을 가서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못하고 내내 잠만 잤다.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기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잠도 못자고 불면증으로 어둠속에 뜬눈으로 지새고 다시 출근하길 며칠. 기억력도 감퇴하고 긴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해 집중력 또한 떨어져 같은 글을 몇 번이고 쳐다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불현듯 20대 후반 석사 논문을 준비하며 겪었던 시절이 생각났다.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안을 살펴보니 옷장은 정리가 되지 않은 옷 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아침 마다 속옷과 양말을 켜켜이 쌓여진 틈속에서 찾는 날이 반복되었다. 싱크대도 엉망이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잘 쓰지 않은 물건을 과감히 정리하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물건을 버리는데 왠지 모를 쾌감도 느껴졌다. 몇 년전에 미니멀리즘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 땐 텅 빈공간을 바라보는 게 하나의 낙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다소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회사에 가서 그 분과 만났을 때 우울한 감정과 기억력 감퇴, 집중력 저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또 다시 전 처럼 정리가 되지 않은 혼돈의 공간이 될 거 같았다. 운동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하여 일단 밖에 나가 걸었다. 이 또한 기분이 다소 진정되었다. 이제 마지막 결정을 할 때다.
일은 해야 하니 약물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오늘 점심시간을 이용해 몇 년전 다녔었던 정신의학과를 찾았다. 몇 가지 설문을 하고 내 진료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곧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진료실로 입장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작성한 설문 결과를 보고 한 마디 하셨다.
'우울증 증상이 다소 높으세요'
우울한 기분이 있기는 하나 문제는 그게 아니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문제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며 간단히 답해주셨다.
'우울하면 기억력, 인지력, 집중력에 문제가 생겨요. 업무를 제대로 보지 못하니까 걱정이 쌓이고 잠을 못 이루고 멍한 상태에서 다시 회사에 출근하고..이러면서 악순환이 만들어지는 거에요. 일단 잠을 좀 주무셔야겠어요.'
나는 되물었다.
'혹시 제가 성인 ADHD는 아닐까요? 집중이 되지 않고 자꾸 딴 생각이 나서 업무에 집중을 못하고 상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음.. 그건 아니구요. 성인 ADHD라는 거는 어린 시절 ADHD 증상이 있는 분들이 성인이 되어 재발하는 걸 말하는 거에요. 당연히 선생님은 그런건 아니니 걱정마세요. 약을 먹으면 인지력이 향상 될 테니 일단 잠을 푹 주무시면 되겠어요'
약을 처방받고 나오는 길에 뭔가 기분이 나아졌다. 아직 약을 복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마 이제 곧 치료가 될 거라는 희망때문이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잠시 시간을 내어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음.. 나 말할 게 있는데.. 사실 나 아파. 우울증이 좀 있대. 그래서 인지력이 떨어져서 이런 악순환이 만들어지는 거래.'
여자친구가 내 말을 듣고 조심스레 말했다.
'응. 사실 병원에 한 번 가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오빠가 기분 나빠할 거 같아서 말 못했어..'
순간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 일로 우리의 관계를 망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미안했다. 회사는 회사고 우리의 일은 또 다른 세계인데 말이다.
집에와서 다시 어지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저녁에 먹는 약봉지를 들었다. 이걸 먹으면 난 오늘 잠을 잘 잘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