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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un 26. 2021

마이너리티 리포트 09
거룩한 욕심

마이너리티 리포트 #09

민 27:1~11  1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이르되 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현실보다 더 중요한 기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즈음이었다. 방 안에서 놀고 있는데, 밖에서 어른 남자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손이 끊겼어! 손이 끊겼어!” 하며 누군가 큰 소리로 엉엉 우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옆집 아저씨였다. 어렸을 때, 나는 단층으로 된 다세대주택에 살았었다. 길가에는 통닭집이 있었고, 그 통닭집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우리 집이 있었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살다 보니 통닭집에서 가끔 우리 집 마당을 쓰곤 했다. 

    

통닭집에는 딸만 둘 있었다. 큰딸이 나랑 친구였고, 작은딸은 좀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통닭집 아주머니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부부는 아들을 낳을 요량으로 셋째를 가졌다. 당시 시골에는 병원에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많았다. 아침부터 우리 집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물을 끓이길래, 나는 무슨 잔치를 벌이려나 했다. 아저씨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참 좋았다. 그런데 그만 셋째를 낳아보니 딸이었다. 아기를 씻길 더운물을 받으러 나온 아저씨가 가마솥 앞에 주저앉아서 “손이 끊겼다!”라며 하늘이 무너진 듯 울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아저씨가 크게 손을 다쳤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아저씨의 통곡 소리를 듣고도 마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한 때, 초음파 검사로 태아를 감별해서 딸이면 낙태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것이 불법이 되었다. 남자가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한 사회의 대표적인 폐해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병원에 가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시골 부부에게 태어난 것이 통닭집 셋째에게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아들이 없는 사람들은 “조상 뵐 낯이 없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말 그대로 조상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근대의 한국 사회에도 이런 생각이 만연했었다면, 고대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땠을까? 물론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해 볼 수 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는 가문의 대를 이어 주어지는 기업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에 대한 애착이 더욱더 깊었을 것이다. 그 결과 아들을 낳지 못해서, 대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죄인처럼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다가, 한 주석에서 자녀가 없어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신의 저주로 여겨졌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도 그토록 아들을 낳으려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으로 만연했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인 ‘말라와 노아, 호글라와 밀가, 디르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녀들의 이름이 의미 있게 등장하는 것은 민수기 27장과 여호수아 17장뿐이다.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그저 자기 아버지의 기업을 자신들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했고, 그 기업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짧은 내용의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간단하고 명료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겨우 두 절의 문장 안에 다 정리했다.     


민 27:3-4 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슬로브핫의 딸들은 무엇보다 먼저, 아버지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죄인 취급당하면 안 된다고 선언한다. 그녀들의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른 출애굽 세대들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고라의 무리와 같이 하나님을 거슬러 심판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고라의 자손들조차, 자기 아버지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았다(민 26:11). 그런데 슬로브핫은 오직 아들 없이 딸들만 있다는 이유로 기업을 못 받게 되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크게 잘못되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오직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들보다 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에 반대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결론으로 동기와 과정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고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마치 아들이 없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평가하고 다른 신앙인을 평가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어떤 평가는 동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에 대한 것들이 그렇다. 그러나 한때는 진리처럼 여겨지던 것이 세대가 바뀌면 전혀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우연히 판소리 흥보가를 듣게 되었다. 흥부와 그의 아내가 함께 두 번째 박을 타는 장면이었는데, 흥부가 이번에 탄 박에서도 금은보화가 나오면 형인 놀부네 집에 가져다주겠다고 하니까 흥부의 아내가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     


판소리 ‘흥보가’ 중에서

흥보 마누라 기가 막혀 “나는 나는 안 탈라요. 여보 영감! 형제간이라 잊었소? 엄동설한 추운 날에 구박을 당허여 나오든 일은 곽 속에 들어도 못 잊겄소. 나는 나는 안탈라요.”

흥보가 화를 내며 “답답한 사람아 타지를 말어라. 계집은 상하의복(上下衣服)이요. 형제는 일신수족이라. 의복은 떨어지면 해 입기가 쉽거니와 형제 일신수족은 아차 한 번 뚝 떨어지면 다시 잇지는 못 허는 법이니라.”     

흥부네 가족은 추운 겨울에 놀부에게 구박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흥부의 아내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죽어서 관속에 들어가도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흥부는, 남편이라는 사람이 글쎄 “당신은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같은 사람이고, 형님은 나와 한 몸이다.”라고 대답한다. 흥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마음으로 동의하기 어렵고, 흥부의 말 때문에 무언가 더 큰 갈등이 생겨날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 흥부의 말을 들은 아내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흥부의 말을 들은 흥부의 아내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면서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하고는 다시 같이 박을 타기 시작한다.     


이 대목을 보면 당시 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유교적 가치관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사회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가족이 아니라 혈연이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혈연은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금, ‘흥보가’의 이 내용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회적 가치관뿐만 아니라, 문화나 이데올로기의 측면도 그렇다. 전염병으로 팬데믹 상황이 되고 보니, 평일에도 인파로 만원이었던 극장이 명절에도 텅 비는 현상이 일어났다. 전에는 가족과 함께 극장에 나들이하는 것이 행복해 보였지만, 세계적인 질병이 만연한 시대에는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1980년대에는 이데올로기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의 중심이었는데, 아직도 분단되어있는 한반도에서조차, 요즘에 와서는 이 이데올로기가 정치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도 기성세대에 한정된 주제인 경우가 많다. 아마도 조금 더 세월이 지나 세대가 바뀌면, 아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에 발맞춰 우리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우리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가치관 등을 기준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때로는 그 결정이 잘못되었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결국 그 잘못된 결정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삶에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가치관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당시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가치관을 기준으로 해서는, 기업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법적인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슬로브핫 딸들은 현실보다 더 고귀한 기준으로 자신들의 상황을 판단하고, 모세 앞에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신앙적인 기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기업을 분배할 때, 아들이 없는 가문은 땅을 얻지 못했다. 슬로브핫 딸들에게 이 일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예로 살다가 탈출해 갖은 고생을 했는데, 도착한 목적지에서 아무 기업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노예의 삶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착지가 없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심지어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버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없다는 것이 이런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해도,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요구한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이쯤에서 길지 않은 그녀들의 주장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한다.     


민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성경을 읽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떻게 이렇게 간결하게 핵심을 짚어낼까? 슬로브핫 딸들이 주장한 이 한 문장도 그런 부분에 속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기업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것들은 그녀들에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슬로브핫 딸들은 핵심을 짚었다. 그리고 바로 이 구절이 그녀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성경의 족보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역할을 한다. 이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통로다. 성경은 족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시는 복이 어떻게 전달되고 이어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성경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 누렸다는 가시적이고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슬로브핫 딸들에게, 아버지 슬로브핫이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딸들과 자손들이 하나님께 복 받은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누릴 천국의 축복에서 제외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슬로브핫 딸들이 행한 이례적인 판단과 결단은 신앙의 기준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복,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마땅한 축복의 권리가 바로 그 기준이었다.     


물론 성경과 다른 관점에서, 슬로브핫 딸들이 경제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로 땅에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에는 장자 지파가 요셉 지파였다. 그녀들은 당시 실세였던 요셉 지파, 그것도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 지파의 속해 있었기에, 자기 지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사회적인 합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슬로브핫 딸들이 그런 세속적인 욕심을 이유로 아버지의 기업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아버지 슬로브핫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원한 복에서 제외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들과 자녀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축복에서 제외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슬로브핫 딸들이 용감하게 모세 앞으로 나아갔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다.     


모세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평소처럼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결을 내릴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해 질문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슬로브핫 딸들이 판단하고 결단한 이 일이 신앙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편을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녀들이 당신의 영원한 복에서 제외되지 않으려 했던 그 마음을 아시고, 슬로브핫 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민 27:7 중에서)    

 

주님은 그녀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다. 그래서 그녀들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히브리어 원어로 민수기 27장 7절을 읽으면 제일 먼저 “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말은, 개역개정판 성경에 “옳으니”라고 번역되었다. 이 말은 원래 “똑바로 세우다.”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정당한’, ‘옳게’라는 뜻의 형용사나 부사로 사용된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그녀들에 대해 “정당하고 옳다.”라고 평가하셨다. 그녀들이 하나님의 법을 “똑바로 세웠다.”라고 칭찬하셨다. 당시 사회적으로는 슬로브핫 딸들의 요구가 틀린 것처럼 보이고, 억지 주장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 그녀들은 옳았다. 오히려 슬로브핫 딸들은 당시에 비뚤어졌던 하나님의 법을 똑바로 세운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거룩한 욕심     


나는 구약 학자이자 여성 신학자인 ‘마르바 던’의 책을 참 좋아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질병으로 큰 고초를 겪었고, 그로 인해 평생 많은 불행을 맛보았다. 그녀는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며’라는 이사야서 묵상집을 통해, 지금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환경이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내가 인생에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안식’이라는 그녀의 책을 읽으며 큰 위로를 받았었다. 그래서 마르바 던의 책을 찾아 읽었고, ‘고귀한 시간 낭비(A Royal Waste of Time)’라는 책도 읽게 되었다.     


‘고귀한 시간 낭비(A Royal Waste of Time)’는 예배에 관한 책인데, 제목부터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경제성과 실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예배는 어쩌면 시간 낭비다. 예배가 한 시간을 넘어가면, 불안하다 못해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있다. 목사에게 설교를 짧게 하라고 은근한 협박을 하는 사람도 꽤 있다. 요즘에는 아예 자기의 일정에 맞춰 미디어로 예배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예배는 그냥 시간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시간 낭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거룩한 사랑을 낭비하시는 하나님께 아낌없이 시간을 낭비해 예배드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아낌없이 낭비해 예배할 수 있을까? 손해 보는 것 같은 우리의 현실적인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마르바 던은 이 책에서, 예배를 참으로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한 낭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낭비는 무언가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낭비의 전제조건은 채워져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싶은 욕심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고귀한 욕심, 거룩한 욕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의 자격을 갖고 싶은 욕심, 그것이야말로 고귀하고 거룩한 욕심이다.     

약속의 땅에서 기업을 받는 것은 광야를 지나온 모든 출애굽 세대가 간절히 바라던 하나님의 은혜였다. 가나안 땅에서 받을 기업의 약속은 모세의 입술을 통해 베풀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다. 슬로브핫 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거룩한 복에서 한치도 제외될 수 없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가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족보에, 자기들과 자녀들의 이름을 기록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녀들을 옳다고 인정하시고, 그녀들의 거룩한 욕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세웠다고 칭찬하셨다.     


지나친 육신의 욕심은 항상 문제를 만든다. 식욕이 지나치면 건강을 해치고, 편안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면 환경을 파괴하며, 힘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면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생명을 앗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육신의 욕심을 제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육신의 욕심을 제어할 방법을 한 가지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거룩한 욕심을 가지는 것이다.     


갈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거룩한 욕심을 채울수록 육체의 욕심은 조절되고 제어된다. 드러난 결과가 같아도 거룩한 욕심 때문인 결과와 육체의 욕심 때문인 결과는 서로 대가가 다르다. 하나님의 심판이냐 칭찬이냐가 거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거룩한 욕심을 가지라.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거룩한 욕심을 채움으로 세속의 욕심을 제어하고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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