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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05. 2023

그리스도인의 인격 04 인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빛내주는 인격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엄마에게 일곱 살과 여덟 살짜리 형제가 있는데, 연년생이다 보니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한다. 한 번은 두 아이가 놀기만 해서 한꺼번에 방에 들여보내고, 밀린 학습지를 다 풀라고, 안 그러면 혼낸다고 으름장을 놓았단다. 두 아이가 함께 방에서 학습지를 풀고 있는데 방에서 큰 소리가 나더란다.

“형은 나빠!”

“야! 네가 더 나빠. 내 발은 내 맘대로 하는 거야!”

“그럼 왜 지난번엔 나한테 발을 빌려갔어? 그러니까 나한테도 발을 빌려줘야지. 형은 공평하지가 않아. 이제 형아 방에 쓰레기 다 버릴 거야!”

내용이 좀 이상해서 엄마가 들어가 중재를 했다.

“이 녀석들 왜 발 가지고 난리야? 도대체 뭐야? 응?”

그랬더니 동생이 소리를 치면서 엄마한테 말했다.

“아니, 이거 봐봐 엄마! 12하고 17을 더해야 되는데, 손이랑 발이 더 필요하니까 형아가 빌려줘야지. 근데 안 빌려준대!”

듣고 있던 형이 소리쳤다.

“야! 나도 손으로 내 학습지를 해야 안 혼나는데, 내 걸 빌려주면 난 어떻게 하냐?”

“아니? 누가 손 빌려 달래? 내가 발가락 빌려 달랬잖아!” 하고 싸우더란다.

또 얼마 전에는 동생이 도미노 놀이를 하고 있었단다. 집중해서 도미노 블록을 모두 세워 놓았는데, 그때 형아가 축구공을 드리블하고 와서는 거기에 슛을 쏘았단다. 작은 아이가 씩씩거리며 엄마에게로 와서 이렇게 물었단다.

“엄마 난 언제까지 형아랑 같이 살아야 돼?”     


가족들이 함께 사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사는 데도 인내는 필요하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아무런 위기 없이 평생을 사는 부부는, 간혹 있기는 하겠지만, 거의 없다. 여러 번의 심각한 결혼생활의 위기를 넘겨야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와 자매 간에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의 위기를 넘겨야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는 진정한 가족이 된다. 사랑이 전제된 가정도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가 쉽기만 하겠는가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의 모든 관계와 우리 인생의 모든 측면에서 인내는 꼭 필요한 인격이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라고 말했던 용기에도 인내는 꼭 필요하다. 용기를 일회적으로 발휘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가 삶을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계속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절제’에도 인내는 꼭 필요하다. 열 번을 절제해도 한 번 절제하지 못하면 큰 낭패를 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전은 어떤가? 한 번 꿈꾸고 마는 꿈은 현실이 되기 어렵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비전을 계속 바라보아야 꿈을 이룰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용기를 내셨다. 비전을 가지고 십자가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절제하셨다. 그러나 결국 그 십자가를 인내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용기와 비전과 절제를 이루셨다. 그렇기에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더욱 빛내주는 그리스도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포기하기 쉬운 세상


현대는 인내하기 참 어려운 시대다. 음식을 먹어도 맛있게 그러나 빨리 만들어 먹는다. 인스턴트식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각종 음료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집안까지 음식이 배달된다. 작물을 키우고 가축을 키우는 일에도 예전보다는 훨씬 빨리 출하하는 것이 농업의 핵심 중 하나가 되었다.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 한나절 만에 부산에 가서 일을 보고 돌아올 수 있고, 비행기만 타면 지구 반대편에도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도 급해지고 바빠진 경향이 없지 않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어요.”라는 말이 좋은 예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벼락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괄목할 만한 성장, 불꽃이 튀는 사랑, 단번에 몽땅 해결되는 문제, 이런 것들을 꿈꾼다. 신앙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번에 역사하셔서 사람과 상황을 바꾸시고 성장시키시며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을 기대한다.     

이제는 어쩌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멋있어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사에게 사표를 집어던지고 통쾌하게 회사를 빠져나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편의 뺨을 호되게 때리고 이혼하는 것을 통쾌한 것으로 묘사하는 드라마가 있다. 선생님에게 대들고 유리창을 다 깨뜨리면서 학교를 떠나는 학생을 멋진 사람으로 표현하는 영화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한다.     


인내하는 사람보다는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왜 그럴까? 포기하는 게 쉽기 때문이다. 직장에 가서 일을 하는 것보다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게 훨씬 쉽다.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훨씬 쉽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보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게 훨씬 쉽다. 그러나 그 쉬운 포기를 하고 나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된다.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더 이상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정을 버리고 자기 마음이 원하는 인생을 찾아가면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학교에 가지 않고 PC방에서 게임만 하면, 하고 싶은 일이 게이머가 아니라면, 어른이 되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인내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쉽지만, 포기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인내의 대가


포기에 대가가 따르는 것처럼 인내에도 대가가 있다. 인내의 대가는 대부분 긍정적이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시험이 몰려올 때 그것을 인내하면 매우 위대한 상을 받게 된다. 어떤 시련이 오든지 그것을 견디어 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약속인 생명을 얻게 된다. 심지어 그 시련이 죄의 결과라 해도 마찬가지다.     


시험이라는 말은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는 동사가 원형이다. 이 말은 ‘시험하다’, ‘시도하다’, ‘유혹하다’라는 세 가지의 뜻을 담고 있다. 시험에 따른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것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시련을 겪어내는 것, 그리고 유혹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 세 가지이다.     

우리는 흔히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르면서 당하는 시련은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당연히 시련을 잘 이겨내면 자격을 얻기 때문에 이런 시련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겪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시련을 겪어내는 것도 매우 좋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 결과와 상관없이 박수를 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유혹에 빠져 당하는 시련은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유혹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자기 스스로도 포기하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자기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심지어 유혹에 빠져 시련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그 고통을 잘 이겨내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사랑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 그것이 야고보 사도가 전해준 말씀이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12절 말씀에 대한 설명을 13~15절에 걸쳐서 설명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우리의 욕심에 끌려 당하는 유혹을 말한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13절에 시험이라는 말이 4번 나오는데, 나머지 세 번은 조금 전에 말했던 “시험”이라는 뜻의 “페이라조”라는 단어가 쓰인다. 그런데 그중 세 번째,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에서는 “시험을 받는다.”라는 말에 “아페이라토스”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이 단어의 뜻은 “유혹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12절에서 말씀하시는 “시험”이라는 말에는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져 고통당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그 건 뺄까 봐 친절히 13절부터 15절에 이르기까지 한 번 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격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스스로 시련을 견디는 것처럼, 일부러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고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속이는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또 다른 측면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인내는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하다.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을 참는 것이든, 목표에 이르기 위해 시련을 견디는 것이든,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든, 그것을 버티고 견뎌내면 선물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



포기의 순간 인내할 수 있는 힘

     

우리는 포기의 순간을 인내함으로써 넘어갈 수 있다. ‘포기의 순간’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우리가 포기하는 것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계속 인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순간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업이나 직장, 부부관계, 신앙생활 등 대부분의 상황에서 고통이나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순간적으로 우리는 포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우리가 포기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대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때, 십자가를 인내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를 인내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포기의 순간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구해보자. 그러면 그때마다 우리는 인내의 대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인내가 모이면 결국 우리의 용기와 절제와 비전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항상, 모든 교회가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으면 연합하고 화평케 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방회에서 특별히 장소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처음 철원에서 목회할 때도 그랬고, 서울에서 목회할 때도 그랬고 의정부에서 목회하는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미리 상의 없이 너무 촉박한 시간에 부탁을 받는 때가 종종 있다.     

예전에 한 번은 지방회 장소를 부탁받았는데, 조금 황당했다. 회의가 열흘도 안 남았는데 연락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통지를 받아서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했지만, 그래도 지방회를 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은혜롭게 잘 치르고 싶었다. 이왕이면 우리 교회에서 지방회를 한 뒤, 우리 지방의 교회들이 더 교회다워지고 연합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큰 회의를 준비하다 보니 소소하게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일상적인 교회의 일과를 다 감당하면서 해야 했고, 회의 당일이 주일이었던지라 주일 준비도 해야 했다. 게다가 선교와 교육 등의 일정이 겹쳐서 회의 당일인 주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모든 사역자들이 일을 해야 했다. 일이 많은 건 그나마 괜찮은데, 우리 교회 자체적인 행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회의를 준비하는 동안 마음 상할 일이 여러 번 생겼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을 위해서 하는 거야.’ 하며 잘 넘겼다. 새벽 1시가 넘어갈 무렵 매우 힘들고 지쳤을 때, 나는 우리 사역자들에게, 나 자신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피곤하고 힘들지? 그래. 하지만 분명히 보람 있을 거야!”     

그런데 그날 밤, 모든 주일 일과가 끝나고, 회의가 다 끝났는데, 정말 보람 있게 되었다. 지방의 목사님 여럿이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고맙고, 감사하다.”라고 했다. “정말 은혜롭고 행복한 회의를 했다.”라고 말해 주었다. 어떤 목사님은 웃으면서 “수고하셨어요. 감사해요.”하고 나를 꼭 안아주고 가셨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정말 보람 있었다. 몇 번 벌컥 올라오는 걸 인내하기 참 잘했다. 작은 일에 큰 상을 받은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 잘 해내면, 목회도 인생도 승리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보람 있게 하실 거라고 믿고 인내했더니 다 얻었다. 자칫 인내하지 못해 다 잃을 뻔했는데, 하나님의 은혜였다. 모든 것을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 두 마디 기도를 했다.     

“선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인내하지 못해 많은 대가들을 치렀던가? 후회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내를 선택해 보자. 그리고 인내의 대가를 경험해 보자.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라서 끝까지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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