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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Apr 11. 2021

세리머니 열심히 하면 10만 원도 벌지요

배구 경기를 볼 때 의외의 재미 포인트는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보는 것이다.


보통 선수들은 득점을 하면 자신의 팀 선수들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하지만 극적인 상황에서 득점을 했을 경우, 블로킹을 완벽하게 해낸 경우, 서브에이스로 분위기를 바꾼 경우 등 자신의 플레이가 만족스러울 때면 세리머니가 절로 나온다.


세리머니 유형은 다양하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는 선수, 유행하는 댄스를 추는 선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강렬한 액션을 취하는 선수, 다짜고짜 감독님에게 달려가 하이파이브 또는 허그를 하는 선수 등이 있다. 그리고 짧고 강렬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큰 소리로 포효를 하는 선수도 있다.


세리머니 때문에 울고 웃는 프로배구 경기장. 과연 선수들은 어떤 세리머니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까?


오랜 시간 대한항공을 응원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타 팀 선수들에 비해 대한항공 선수들이 다소 점잖다는 것이었다. 기쁨도 슬픔도 크게 티 내지 않는 선수들이라 팬들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 팬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현재 OK금융그룹에서 활약하고 있는 진상헌 선수는 대한항공에서 유일하게 세리머니가 화려했던 선수다. 기독교를 믿는 진상헌 선수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세리머니부터 비행기, 복싱, 에어로빅 등 다양한 액션을 가미한 세리머니를 선보였다. 코트를 뛰어다니며 누구보다 흥에 겨웠던 진상헌 선수의 세리머니는 타 팀 팬들에게는 '밉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 인터뷰를 통해 배구를 보러 와주는 팬들과 선수들의 분위기를 업 시키기 위해 자신도 꽤 노력하고 있음을 알렸고, 심지어는 다른 스포츠 경기에서 선수들이 어떤 세리머니를 하는지 보고 연구한다는 말을 해 개인적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의 말처럼 진상헌 선수의 세리머니는 때때로 대한항공 선수들을 웃게 만들었고, 그것이 팀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진상헌 선수가 세리머니로 유명세를 떨치기 전, 현재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으로 활약 중인 고희진 선수의 세리머니는 고정 레퍼토리가 있었다. 센터 포지션으로 활동했던 그는 고릴라라는 별명에 걸맞게 코트를 누비며 심장을 쿵쿵 때리는 고릴라 퍼포먼스를 세리머니로 보여주었다. 정말 고릴라처럼 보였던 그의 모습이 얄밉기도 했지만 코트 안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현대캐피탈에는 특이한 세리머니가 있다. 문성민 선수가 서브에이스를 하면 모든 선수들이 동그랗게 모여 땅을 격파하는 모션을 하거나 두 손을 입에 맞춘 뒤 하늘 위로 찌르는 모션을 한다. 처음에는 뭘 하나 싶어서 기웃거렸었는데 언제부턴가 문성민 선수가 서브에이스를 넣으면 다 같이 모여서 어떤 모션을 취하는지 궁금해서 지켜보게 되었다. 사실 다양한 세리머니가 있지만 문성민 선수의 세리머니는 착한 세리머니에 속한다. 그의 세리머니를 두고 착한 세리머니라고 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구에서는 세리머니를 할 때 상대 팀을 향해서는 안된다. 기본 매너 중 하나이고, 심할 경우 경고 카드를 받을 수도 있다. 세리머니 때문에 경고를 받거나 분란을 조장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올 시즌 누구의 세리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KB손해보험 스타즈의 용병 케이타 선수이다. 올해 스무 살인 케이타는 어린 나이에 걸맞은 에너지를 품고 등장해 코트 위에서 넘치는 끼와 흥을 보여주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한 손을 쫙 펴서 얼굴 앞에서 흔드는 세리머니는 자신의 공격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무리 블로커들이 포진해 있어도 자신은 그 위로 공을 때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긴 세리머니. 그러나 춤을 추고, 코트 위에 드러눕고, 감독마저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던 케이타의 세리머니는 결국 문제가 되었다. 


2020년 11월 13일 KB손해보험과 OK금융그룹의 경기에서 3세트 막판에 케이타는 상대팀 코트를 향한 채로 춤을 추듯 세리머니를 했다. OK금융그룹 팀의 용병인 펠리페는 상대팀을 바라보며 세리머니를 하는 것은 비매너 행동이고 상대를 자극하는 행동이라며 항의했고, 이에 심판은 케이타에게 가볍게 주의를 주며 넘어갔다. 하지만 이미 빈정이 상한 OK금융그룹 선수들, 경미했던 갈등은 4세트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OK금융그룹의 최홍석 선수가 공격 성공 후 보란 듯이 상대 코트를 바라보며 세리머니를 했고, 이에 KB손해보험의 황택의 선수는 블로킹을 성공한 뒤 똑같이 상대 코트를 지켜봤다. 흥분한 양 팀 선수들은 경기가 끝났지만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네트를 사이에 두고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대한항공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다 KB손해보험으로 이적한 김학민 선수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고참 격인 그가 OK금융그룹 선수들을 향해 '너희가 먼저 시작했잖아!'라는 샤우팅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양 팀 감독과 심판진이 나서서 말렸고 겨우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세리머니 하나 때문에 배구 코트 위에서 혈투극을 볼 뻔했다.   


앞서 대한항공은 점잖은 팀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2015-2016 시즌 러시아에서 온 용병 파벨 모로즈 선수의 등장은 대한항공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다. 헐크를 연상케 하는 세리머니와 손을 귀에 대고 함성을 유도하는 세리머니가 모로즈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처음에는 우리 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적응이 되지 않아 얼떨결에 박수는 쳤지만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대한항공 선수들 역시 두 시즌을 함께 했던 마이클 산체스에게서 볼 수 없는 강렬함에 당황하면서도 점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정지석 선수는 누구보다 먼저 그의 문화에 젖어들었고 모로즈가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열정적인 세리머니를 이어갔다. 하지만 모로즈 역시 격한 세리머니 때문에 논란의 중심이 된 적이 있었는데, 2015년 12월 31일 한국전력과의 경기에서 당시 대한항공의 감독이었던 김종민 감독이 주심에 항의한 후 경고를 받자 유니폼 안에 손을 넣고 손가락 욕설을 하는 제스처를 취해 경고를 받았다. 김종민 감독은 선수가 의기소침해질까, 팀 분위기가 다운될까 하는 노파심이 일어 모로즈에게 세리머니를 할 때 상대팀을 보고 하는 것만 제외하고 마음껏 해도 된다며 그를 치얼업했다. 


배구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경기를 펼치기 때문에 야구, 축구, 농구처럼 몸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다. 모든 논란이 되었던 상황들 역시 언성을 높이며 말로 싸운 정도이지 신체 접촉을 하며 몸싸움을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배구가 신사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만큼 매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 제한적이라 어떤 방식으로든 세리머니를 하는 것이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지난 준플레이오프 경기를 펼치는 가운데 OK금융그룹의 석진욱 감독이 작전 타임 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


"(KB손해보험 용병) 케이타보다 세리머니 잘하면, 할 때마다 10만 원씩 줄게!"


중요한 경기인 만큼 석진욱 감독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고, 선수들은 웃으며 코트로 들어갔다.


배구에서 세리머니는 그저 선수 한 사람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한 팀의 분위기를, 더 나아가서는 한 경기의 분위기를, 조금 더 나아가서는 한 시즌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 행위이다. 한 명의 선수가 보여주는 세리머니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지는 꾸준히 직관 또는 집관을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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