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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Apr 05. 2016

#5 - 너에게 하는 인사

안아줘

글 - 관우림

그림 - 정아 (인스타그램 - lint3113)


내가 H를 처음 품에 안은 건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하며 시간을 보내다 시간이 깊어 길을 나섰다. 그리고 H의 집이 있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H의 집은 언덕에 있었다. 우리는 보도를 걸었다. 자정이 넘어선 왕복 6차선 도로는 한적했다. 이따금 택시가 다녔고, 또 이따금 버스가 다녔다. 한 번은 큰소리를 내는 오토바이가 지나갔지만 특별히 거슬린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H가 말했다.

“안아볼래?”

H의 얼굴은 둥글고 작은 편이었다. H의 얼굴은 한 눈에 들어왔다.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기억할 수 있었다. H의 얼굴은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H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누군가에게 쌍꺼풀 수술을 하면 어떨까 하고 물었는데 상대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단다.

화장을 한 H의 얼굴의 얼굴을 보고 90년 중반쯤 텔레비전에서 봤을법한 연예인의 느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촌스러웠냐 물어보면 또 그렇지는 않다. 검은색 목폴라에 진한 회색의 스커트를 입고 검은색 스타킹과 높은 구두를 신은 채 또 스커트와 같은 색의 코트를 입은 H의 모습은 90년대 건 2000년 대 건 2010년 대 건 시간에 상관없이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시로 H의 옆모습을 봤다. H에게 눈을 돌리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보고 있었다. 이마에서 시작한 선은 코에서 잠깐 높이 솟았고 인중을 지나 입술에서 다시 뭉뚝해졌고 한눈을 팔 틈 없이 같은 선은 턱과 목 아래로 계속 내려갔다. 눈썹에 부딪힌 앞머리는 H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면 주황색의 불빛이 H의 볼에 흡수돼 버렸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안아보고 싶다.

“안아볼래?”

그 말을 듣고는 속 마음이 드러난 거 같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하지만 고민 없이 그 순간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곤 H의 손을 잡고 있던 팔에 힘을 줘 내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그때 나는 H를 오랫동안 안고 있지 못했다. 너무 세게 끌어당겼는지 둘이 부딪히며 H의 콘택트렌즈가 빠져버렸다. 둘은 핸드폰의 엷은 불빛에 의지해 땅바닥에 떨어진 렌즈를 찾느라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길어질 새도 없이 작은 사고로 끝나버린 H와 나의 최초의 ‘안음’은 우리의 최초의 인사이기도 했다. 

H와 내가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었다. 주변에 누가 있든, 그곳이 어디든 간에. 어쩔 때는 짧게, 어쩔 때는 길게, 느슨하게 혹은 강하게. 껴안은 채 한 참을 뒤뚱거리기도 했다. 지하철 역에서, 카페에서, 공원에서, 도서관 앞에서, 집에서. 거세게 안다가 내 턱과 H의 이마가 부딪히기도 했다. H를 안으면 그녀에게 뭍은 냄새들이 났다. H는 특별히 향수를 쓰지 않았다. 화장품 냄새는 옅었고, 샴푸 냄새가 남아있었으며 섬유유연제 냄새가 H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냄새들이 좋았으며 H 역시 내게 붙어있는 냄새들이 좋다고 했다. 헤어질 때도 H와 나는 서로를 안아줬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향하는 길에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H를 눈으로 찾으면서도 콧등에 오른 H의 기운은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H를 안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하루 종일 안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놓지 않으려 있는 힘껏 보듬곤 했다. 그러면 H 역시 나를 꽉 안았다. 그녀를 안고 잠든 날이면 뒤척이는 일도 없었다. 좁디좁은 침대 위에서, 아무리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어도 오랫동안 잘도 잤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연인의 향기가 수면제보다 스무 배 강력한 효과가 있다지.

그러고 보면 누군가를 안는 행동은 ‘키스’만큼이나 특별하다. 있는 힘껏 안고 놓지 않으려 했던 상대는 그 숫자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쉬이 포함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혹은 그들이 나에게 허락하는 것은 손을 흔드는 인사, 고개를 숙이는 인사 것도 아니면 악수 정도다. 악수는 ‘끌어안음’과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하다. 상대의 체온이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악수 도일종의 ‘안음’이다. 하지만‘끌어안음’과는 다르게 찰나적이다. 악수는 자신감의 표시라고도 하더라. 비즈니스로 만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악수의 힘으로 자신을 어필하라고 했다. 악수를 하도 보면 드물지만 힘을 겨루는 일도 있다. 손의 힘은 자존심이다. 연인을 만나는데 자존심은 필요 없으니까.

H를 한껏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버린 것은 어쩐지 H가 닳아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기분이 든 탓이었다. 끌어안음이 익숙해져 버려 나중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따위의 걱정을 했다. 그때부터 H를 잘 안지 않게 돼버렸다. 행동을 아끼기 시작하면서 말도 아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H는 닳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H는 살은 조금 빠졌고 긴 머리를 짧게 쳐버리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녹이 슬어버렸다. 녹이 슬어버린 것은 내 쪽이었다. 아끼다 아끼다 결국에 노랗게 변해버린 흰색 셔츠를 옷장 속에서 발견하듯이. 차라리 실컷 입어보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아깝지 라도 않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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