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보는 사람들과의 평범한 시간에도 순간 힘들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잘 넘기던 일에도 감정이 몰아치기도 하고요. 다행인지언젠가부터 증상이 몸으로 와요. 머리가 아파지고식은땀도 나더라고요. 그럴 때면 모임에서 우선 나와요. 왜 다행이냐면 전에는 불편해져도 일어설 용기가 없었거든요. 친한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먼저 일어나는 일을 잘 못했으니깐요. 제일 어려운 것이 싫은 내색이고 서운한 말을 표현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 불편한 순간이 되면 몸이 먼저 반응을 해요.어쩌면갱년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름 괜찮아요.
머리가 아파서 갑자기 자리를 뜨고 시간이 지나니 혹시기분이 상했느냐고 연락이 왔어요.그렇지만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고 속이 상한 거였어요. 속이 상한 것은 서운함때문이에요. 가깝지 않으면 서운하지도 않거든요. 기분만 상하죠. 이런 감정은 관계에 대한 기대 때문 같아요. 친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런건 욕심인걸알아요.그래서궁금해하고알면그걸로 된 거예요. 상대의 마음이 상한지 아닌지 읽어주면 되는 것 같아요. 언짢음도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지게 되니깐요.
생각이 많아질 때면 보통은 잠을 자거나 걷기를 하는데 기분이 가라앉을 때 좋은 게 요리이기도 해요. 순서를 기억하고 시간을 체크해야 하는 음식들이요.
시장에서 엿기름 한 봉지를 사 와서 식혜를 만들었어요. 엿기름을 물에 불려 놓고 고두밥을 조금 지어요. 한두 시간 불린 엿기름을 조물조물해서 뽀얀 물이 나오면 맑은 앙금이 가라앉고 윗물이 될 때까지 기다려요. 맑은 엿기름물이 생기면 앙금은 버리고요. 윗물만 밥과 섞어서 보온밥통에 넣어 밥알이 동동 뜨기를 기다리면 돼요. 네다섯 시간이 지나면 밥알이 올라오는 데 그때 불위에서 5분 정도 설탕을 넣고 팔팔 끓여요. 구수한 맛을 기대하면서 맛을 봤는데 이도 저도 아닌 맛이에요. 딱 내 마음 같은 맛이요. 뭔가 빠진 거 같았고식혜 특유의 맛이 아니었어요.
엿기름을 물에 덜 불렸을까, 아니면 덜 우려냈을까, 설탕이 적었나 생각을 해봤어요.
가만히 원인을 생각해 보니 팔팔 끓일 때 설탕의 맛을 놓친 것 같아요. 뜨거운 식혜는 달기를 잘 몰라요. 한 김이 식고 나야 당도가 가늠이 되죠. 속상한 마음도 그래요. 그 순간은 뭘 해도 잘 몰라요. 누구러질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야앞뒤가 보이고 선명해져요.
밥을 두 세 공기는 넣었어야 했는데 밥양이 모자랐어요. 밥을 새로 지어놓고도 틀렸어요. 설탕 없이도 달달할 수 있는 건 밥이 내는 단맛이거든요. 생각해 보니 조금씩 모자란 게 맞았네요. 그래서 밍숭한 맛이 났나 봐요.
들인 시간이 아까워 그냥 시원한 맛으로라도 먹자 싶어서 밤새 베란다에 내다 놨어요.
며칠 많이 추웠잖아요.
아침이 돼서 한잔을 따랐는데 밤새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식혜 맛이 나는 거 있죠. 식혜가 식혜맛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제는 잘나지 않았거든요. 밤사이 밥알들이 더 삭으면서 구수해진 거예요. 조금의 달달함도 생기고요. 끓고 삭히는 사이 식혜가 괜찮아졌어요. 만들 때 기대하던 그 맛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나쁘지않아요.
그리고 음식 중에저울이 필요한 것이 마카롱이에요. 마카롱은 비율에 민감해서 집중을 해야 해요.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 만들기 좋아요. 실수를 덜하거든요. 초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어요. 집중을 한다 해도 모양이 잘 안 나올 때도 있어서 어지간히 기다림이 필요해요.
마카롱 몇 판을 실패했어요. 어느 날은 반죽이 잘못되고 어느 날은 건조를 너무 오래 해서요. 대부분 과잉이 마카롱에 영향을 줬어요. 세상의 모든 일처럼 어려운 게 적당함을 유지하는 거예요. 마음이든 요리든요.
그렇게 망카롱이라고 부르는 예쁘지 않은 마카롱 모양이 나왔어요. 동그란 과자밑에 레이스 같은 것이 삐에라고 하는데 이 삐에가
나오지 않아서 망한 마카롱이 된 거예요.그렇게 손에 익숙하던 마카롱도 오랫동안 만들지 않았더니 연거푸 모양이 나오지 않고 꼬끄라 불리는 동글 과자가 쌓였어요. 두 개 사이에 필링을 하지 않으면 그냥 쿠키지만잘 먹진 않아서 밀폐통에 담아놨어요. 그런데 얼마 전 들리셨던 친정엄마께서 덜다시며 좋아하신 거 있죠. 당뇨 때문에 샌딩 안 한 것이 더 좋으시다고 먹지 않을 거면 마카롱이 된 꼬끄를 다 싸달라고 하신 거예요. 모양은 없지만 엄마께 맛있는 과자가 됐으니 더이상 망카롱이 아니었어요. 아몬드과자로 충분해졌어요.
다행히 재료 마지막즈음 마카롱이 잘됐어요. 그사이 마음도 훨씬 나아진 것 같아요.마카롱을 굽고 나서 바로 먹는 거보다 하루정도 냉장고에서 숙성을 시키는 걸 좋아해요. 밤사이 베란다에서 식혜가 맛있어지듯이 냉장고에의 하루가 필요하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딱딱한 마카롱 꼬끄과자가필링으로 폭신하고 쫀득해지는 마법이 생겨요. 다음날 한입 물었을 때 부드럽고 쫀득한 맛이 느껴지면 잘한 거예요.
요리를 할 때 요리의 특성을 이해하면 쉬운 것처럼관계란 것도 그럴 거예요. 성격을 이해하고 나면 감정의 전달이 조절되거든요.
때로는 가야 할 마음과 그렇지 말아야 할 마음을 조절하는 것도 필요하니깐요.
그래도 시간이란 게 약이 맞나 봐요. 마음도 녹진녹진해지고 어느새 또 챙겨야 하는 마음들로 바빠지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