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호 없이 떠난 사람들

by 인플리

제겐 한 개의 지식으론 백 가지 마음을 헤아리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일깨워 준 책이 있습니다. 바로 현요아 작가의 <나를 살리고 사랑하고>입니다. 작가는 책에서 동생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후, 가족을 잃은 상실을 견디기도 힘든 와중에 맞닥뜨려야 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토로합니다.


보건복지부의 한 조사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하기 전 93퍼센트의 사람이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낸다던데,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신호를 무심히 넘기지 않았는가 질문하는 듯한 시선. 만일 눈앞에 놓인 삶을 바삐 사느라 사랑하는 이의 구조 요청을 지나친 것이 아니냐 여기는 이가 있다면 나는 내 사례를 짚어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동생의 구조 요청을 확인했고, 온 가족이 힘을 다해 도왔으나, 끝내 막지 못했다.


저 역시 통계를 근거로 자살을 암시하는 신호를 놓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광고를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광고 덕분에 실제로 누군가는 소중한 지인의 극단적 선택을 막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통계가 작가가 말한 “가족과 주변인을 잠정 가해자로 모는 시선”의 근거로 쓰인다면,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사실 자살은 예측도, 대응도 어려운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까요. 자살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스웨덴 카롤린스카 공립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크리스티안 뤼크는 영국에서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들 중 85%는 마지막으로 의사를 만났을 때 자살 위험이 낮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자살 시도자 3명 중 1명은, 불과 시도 1시간 전에 갑자기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행동에 옮기기에, 주변 사람이 알아차릴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과 친구에게 답을 들을 수 없는 무수한 질문을 남긴 채” 신호 없이 갑자기 떠나는 자살 사망자도 많다는 겁니다.


저도 가까운 친구를 통해 비슷한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친구 A는 겉으로 보기엔 부러워할 만한 점 뿐이었습니다. 화목한 가정, 유복한 집안, 안정적인 직장, 고가의 취미를 함께 즐기는 친구들까지. A는 성격이 밝고 따뜻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는 어느 날, 정말 갑작스레 세상을 등졌습니다. 아무런 신호도 남기지 않은 채로요. A가 떠나기 1주일 전까지도 A와 DM을 주고받았던 제 친구는 거대한 슬픔, 그리움, 원망, 죄책감이 뒤섞인 파도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A가 왜 나한텐 아무것도 안 털어놨을까?”, “난 믿을 만한 친구가 아니었나?”, “나만 우리가 가깝다고 생각한 거야?”와 같은, 아픈 질문을 붙든 채로요. 각 질문의 물음표는 마치 끝이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친구의 마음에 턱, 걸려 상처를 벌리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2024년의 한 통계는 이러한 상처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겪고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2024년 대한민국의 자살 사망자 수는 잠정 1만 4,439명. 이는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로, 환산하면 매일 약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 뒤에서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을 수많은 자살 사별자(자살 사망자의 가족과 지인)의 고통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살에 관한 오해를 밝혀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이 캠페인이 더 널리 알려지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바로 <The Last Photo>. 영국의 자살 예방 단체 CALM(Campaign Against Living Miserably), 영국 최대 민영 방송사 ITV, 광고대행사 adam&eveDDB가 함께 제작한 캠페인입니다. 2023년 6월 20일, 영국 런던의 사우스 뱅크 거리에 흔한 SNS 사진 50점이 전시되는데요, 사진 속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지인과 웃으며 셀카를 찍고, 파티를 즐기고 있죠. 대회에서 딴 메달을 들어 보이며 특별한 순간도 기념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 공개된 영상 속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아이와 노래를 부르고, 들뜬 표정으로 새 운동화를 신고, 집에서 장난스럽게 춤을 추고 있죠. 그런데 영상의 마지막에 이런 자막이 뜹니다.


이 영상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마지막 영상입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살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These are the last videos of people
who took their own lives
Suicidal doesn’t always look suicidal


겉으로 가장 밝아 보이는 사람도, 속으론 가장 깊은 어둠을 억누르고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 영상을 다 본 후 전 충격과 먹먹함에 한동안 멎어 있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기 전까지 자살 사별자가 왜 신호를 놓쳤거나, 자살을 막지 못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 부끄러웠고요. 일주일간 50만 명 이상이 다녀간 사진전 현장 리캡 영상에서도 저처럼 아무런 신호 없이 떠난 자살 사망자가 이렇게 많다는 충격에 놀라거나,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리는 관람객들이 보였습니다. 자살에 대한 오랜 오해를 깨고, 새로운 이해를 시작하게 한 <The Last Photo>. 이 캠페인은 온라인상에서 자살 관련 논의를 33% 증가시키고, 관련 기부금을 400%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2023년 칸 광고제 필름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큰 주목을 받기도 했죠.


자살 사망자에 관한 진실을 새기면서, 앞서 인용한 책 속 작가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자기 연민이라는 ‘불행 울타리’에서 벗어나려 오랜 시간 스스로를 다독여 온 작가는 불안과 우울을 토로하는 다른 자살 사별자가 슬픔을 천천히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이 되는 위로를 전합니다. 울림이 깊은 그 위로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만일 주변에 불행 배틀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며 왜 그러느냐고 질책하기보다 꼭 안아 줬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아니므로 네 아픔을 완벽히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이해하고 싶다고. 넌 혼자가 아니라고.




<The Last Photo> 사진전 현장 스케치컷

1.png



<The Last Photo> 캠페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Jihi6JGzjI&rco=1



<The Last Photo> 캠페인 리캡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EIXQJnMKAY



<The Last Photo> Truth Canvas

1_1.jpg





keyword
이전 02화Truth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