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어릴 적 사진이 있습니다. 새하얀 눈 이불 위에 오빠와 철푸덕, 누워 있는 사진이에요. 아무도 밟지 않는 두꺼운 눈 위, 분홍색 스키복을 입은 저와 검정색 스키복을 입은 오빠가 반쯤 파묻힌 채 덧니를 드러내며 한껏 웃고 있죠. 몸이 갓 파묻힌 촉감이 재밌어서 웃음이 막 터져 나온 순간을 엄마가 잽싸게 포착하신 것 같아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어릴 적 강원도에 산 덕에 겨울만큼은 진하게 누렸다는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강원도의 겨울엔 눈이 정말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방학이면 TV에서 밤새 눈이 내릴 거라는 대설특보가 나오곤 했어요. 다음날 출근길 걱정을 할 일이 없는 초등학생이던 저와 오빠는 아침에 눈을 뜨면 창밖으로 펼쳐진 새하얀 풍경에 그저 신이 났습니다. 평소 아스팔트 위 무채색 차들로 거뭇했던 주차장은 새하얀 눈이불에 덮여 포근해 보였고, 낮은 건물들은 모두 머리에 귀여운 눈모자를 얹고 있었죠. 저희는 아침밥을 급히 해치우곤 옷을 두껍게 입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먼저 아무도 밟지 않은, 두꺼운 눈이불에 뒤로 돌아 풀썩, 누웠어요. 뽀드득, 하며 파묻히는 촉감이 재미있었거든요. 곧 동네 친구들이 나오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눈을 꼭꼭 눌러 뭉치고, 굴리면 금세 눈덩이가 커졌어요. 눈덩이 두 개를 세로로 쌓고 돌멩이로 눈을, 나뭇가지로 입과 팔을 만들면 어느새 비뚤어진 표정의 눈사람이 생겨났죠. 그런데 아무리 단단히 눈을 뭉쳐도 눈사람은 조금만 볕이 들면 녹아버렸습니다. 눈송이가 꽃송이로 바뀌는 계절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요. 돌이켜보니 첫 만남과 첫 이별 사이가 이렇게 짧고 애틋한 존재가 있나 싶습니다.
눈사람 주위에서 한바탕 눈싸움을 벌인 뒤엔 아파트 놀이터 뒷산의 미니 눈썰매장으로 향했습니다. 경비 아저씨와 고등학생 오빠들이 매해 겨울마다 직접 삽으로 눈을 다져 슬로프를 만들었거든요. 문구점에서 산 빨간 플라스틱 썰매를 낑낑대며 끌고 올라가 슬로프를 단숨에 미끄러져 내려오곤 했습니다. 바람을 가르던 짜릿함은 지금도 생생해요. 전 그렇게 눈을 뭉치고, 맞고, 눈 위에 미끄러지며 온몸으로 겨울을 실험하며 놀았습니다. 누구보다 다양한 겨울 추억을 갖게 되었죠. 요즘 육아로 치면 ‘겨울 촉감놀이’에 푹 빠졌었다고 할까요? 온몸이 눈과 흙으로 더러워졌지만, 뒹군 시간은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그 눈투성이의 시간이 추억투성이의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는 것을, 훗날 전 한 인쇄 광고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A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때 사장님 방에서 본 광고였죠. 당시 소위 ‘광고 덕후’라 불린 사장님은 아이돌 팬이 좋아하는 아이돌 포스터를 벽 여기저기 붙여 두듯이, 좋아하는 광고 이미지를 사장님 방 벽 여기저기 붙여 두셨어요. 어느 날, 사장님은 한 인쇄 광고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난 이걸 보고 내 육아관을 바꿨어
광고 속에는 얼굴과 손, 회색 맨투맨에 흙을 덕지덕지 묻힌 채 서 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사진 아래 이런 카피가 적혀 있었죠.
dirt is good
직역하면 ‘흙은 좋다’입니다. 의역하면 ‘흙이나 먼지를 묻혀가며 자유롭게 노는 것이 아이들에겐 더 좋다’라는 뜻이죠. 놀랍게도, 이 광고는 아동 인권 단체가 아닌, 오모(OMO)라는 세제 브랜드가 대행사 DLKW Lowe와 함께 제작한 것이었죠.
흔히 세제 광고는 깨끗한 옷을 보여주며 강력한 세정력을 어필합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묻은 얼룩을 세제가 통과하면, 얼룩이 지워진 새하얀 와이셔츠가 나풀거리는 장면이 전형적이죠. 그런데 오모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흙먼지에 뒤덮인 가장 더러워진 아이의 옷을 전면에 내걸죠. 세제의 주 사용자인 부모에게 자신감 있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옷이 더러워질까 봐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탐험하는 경험을 막지 마세요. 아무리 더러워져도 저희가 깨끗이 지워드릴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의 맨투맨에 새겨진 글자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MUD IS WORTH MORE THAN
CARPET EVER COULD
‘진흙은 카펫보다 훨씬 가치 있다’라는 뜻입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실내에 카펫을 깔아두니, 아이가 실내보다 바깥에서 흙을 묻히고 맘껏 뛰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은 셈이죠. 어른이 아닌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경험이 삶에 주는 가치를 이야기한 이 광고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12년 칸 라이언즈 보도 부문에서 은상도 수상했죠.
사실 <Dirt is good> 캠페인의 시작은 2004년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제 브랜드가 세정력이라는 기능적 강점을 주로 어필하고 있었어요. 오모는 제품의 강점이 아닌, 삶의 가치에 중심을 둔 스토리로 브랜드를 차별화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캠페인은 전 세계 약 78개국으로 확산되었고, 매일 40만 유로의 매출 성장을 일으켰죠. ‘좋은 더러움’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관점과 감동은 2008년 2월, BBH London과 협업해 런칭한 <Roboboy> 영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꼭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온몸을 더럽히며 노는 해방감이 아이가 진정 아이답게 살게 한다는 진실을 느끼게 해주거든요.
이 광고를 보여주신 사장님은 광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그 의지가 너무 강하셔서 높은 기대치에 맞추느라 야근도 참 많이 했죠. 새벽에 회의가 잡힐 땐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좋은 스토리를 내기 위해 끝까지 끈질기게 부딪히는 태도를, 사장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배웠습니다. 광고 속 좋은 이야기를 눈에 보이는 곳에 붙여두며 새기고, 그 이야기로 실제 자신과 아들의 삶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좋게 바꿀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하는 삶. 광고 업계에는 이렇게 좋은 이야기 하나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답니다.
<Dirt is good> 인쇄 광고
<Dirt is good> Roboboy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SQd-DIUWdY
<Dirt is good> Truth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