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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삼킨 카드 한 장

by 인플리

매주 일요일은 제가 사는 아파트의 분리수거일입니다. 그날마다 아파트 뒤편 분리수거장은 슬리퍼에 편한 옷차림을 한 채, 양손 가득 재활용품을 든 이웃들로 북적이죠. 종이박스, 캔, 플라스틱, 비닐이 종류별로 큰 포대에 부어질 때마다 재활용품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분리수거장을 가득 울립니다. 캔끼리 부딪치는 “깡, 까강”, 포장 비닐끼리 뭉개지는 “석, 서석”, 박스끼리 부딪치는 “푸둑. 푸두두둑”, 배달 음식 용기끼리 부딪치는 “바라라락”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뒤섞이죠. 석 석 후두두둑, 깡깡 빠라락. 챙 채쟁 서억 서억 와라라락. 바라라락. 마치 어떤 음악 같지 않나요? 분리수거장은 일요일마다 마치 <비움>이란 제목의 행위예술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는 듯합니다. 공연을 마친 연주자들은 홀쭉해진 분리수거백을 든 채, 집으로 돌아가죠.


분리수거 백은 한 주간의 소비 히스토리가 담긴 일기장이기도 합니다. 작성자는 ‘살림’이고요. 재활용품을 비워낼 때마다, 각 물건에 대한 소비 만족도가 스쳐 지나갑니다. 예로 전 손잡이가 긴 돌돌이 포장 비닐을 버리면서는 “이제 허리를 안 굽혀도 매트에 박힌 고양이 털을 뺄 수 있잖아”라며 흡족해합니다. 밀폐형 휴지통 포장 박스를 버리면서는 “이제 초파리가 안 꼬이지”라며 만족스러워하고요. 반면, 죄책감을 안겨주는 재활용품도 있습니다. 완충용 포장재가 대표적입니다. 얼마 전 온라인 쇼핑몰에서 작은 머그컵 2개 세트를 주문했는데 컴퓨터 본체만 한 큰 택배 박스가 배송되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알고보니 판매자 분이 컵이 깨지지 않도록 컵을 고정시킨 작은 박스를 뽁뽁이로 칭칭 감고, 완충용 스티로폼으로 겹겹이 두른 뒤 큰 박스에 담아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세심한 포장에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지구에 죄인이 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분리수거 백에 담기지도 않는 큰 박스를 보면서 귀찮더라도 잘 깨지는 물건은 오프라인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일 저녁마다 자주 시켜 먹는 배달 음식은 더 큰 찜찜함을 남깁니다. 연어덮밥 두 개만 주문해도 덮밥, 장국, 반찬 용기가 각각 두 개씩 와서, 총 여섯 개의 크고 작은 플라스틱 용기가 쌓이니까요. 일주일에 두세 번만 배달 음식을 먹어도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은 금세 가득 차버립니다.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한 고래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 분명 플라스틱을 줄이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천은 쉽지 않습니다. 가까운 맛집은 최대한 차나 택시로 다녀오려 노력하지만요.


그런데, 최근, 플라스틱 줄이기 실천을 새로운 관점에서 촉구하는 광고를 접했습니다. 바로 호주 WWF(World Wide Fund for Nature, 세계자연기금)에서 만든 <당신의 플라스틱 식단>입니다. 영상은 충격적인 카피로 시작합니다.


당신은 지난주에
신용카드 한 장을 먹었습니다


화면엔 치아에 씹혀 귀퉁이가 잘게 부서지는 신용카드가 보입니다. 이어서 또 충격적인 카피가 뜹니다.


당신은 다음 주엔
펜 하나를 먹을 것입니다


곧 펜 뚜껑이 씹히면서, 작은 플라스틱 가루가 주위에 흩날립니다. 이는 매년 우리가 섭취하는 미세플라스틱의 양이 10만 개, 즉 매주 5g에 달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신용카드, 펜 같은 친숙한 사물에 빗대어 직관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소 손에 잡히지 않게 느껴지는 환경 문제가 나의 일상, 우리 가족의 몸 속 문제로 확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과학적인 데이터를 감각적으로 번역해 낸 이 메시지에는 강력한 행동 변화를 이끄는 힘이 있었습니다.


광고를 본 후, 저는 환경문제를 거대한 담론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게 만드는 비유의 힘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분리수거장에서 들려오는 플라스틱의 “바라락” 소리도 더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몸속으로 들어간 더 많은 플라스틱을 불편하게 자각시키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물론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바다거북이 사진처럼, 때로는 바다생물이 입는 큰 피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충격 요법이 각성과 행동 변화의 불씨가 됩니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즉각적으로 환기시키고, 윤리적인 책임감을 불러일으키기 떄문이죠. 그런데 ‘환경과 바다생물을 위해’라는 목표에 ‘나 자신 혹은 우리 가족의 건강을 위해’라는 목표가 더해지면, 동기부여는 더욱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후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자기 보존의 영역이니까요. 앞서 언급한 WWF 광고가 미세플라스틱을 ‘매주 삼키는 신용카드 한 장’으로 비유해 우리의 식단과 건강 문제로 직결시킨 메시지가 강력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슷하게 사람들의 일상 속 체감도를 높인 또 다른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비영리단체 Keep Britain Tidy가 진행한 캠페인, <Bin Your Butt>입니다. 이 단체는 담배꽁초 무단 투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배꽁초가 환경에 미치는 막연한 악영향을 경고하는 대신, 길거리에 버려진 꽁초가 빗물받이(하수구)를 통해 강과 바다로 유입되면서 결국 우리의 수자원을 오염시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필터에 든 독성 물질과 미세플라스틱이 수로를 타고 흘러들어와 나와 내 가족이 마시는 물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구체적인 위협을 제시한 것이죠. 윤리적 호소를 넘어 인간의 자기 보존 본능을 위협한 이 메시지는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강력한 비유는 이렇게 ‘남의 문제’, 혹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위협’으로 바꾸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이 힘을 잘 활용하면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익숙한 사물과 감각으로, 우리의 코 앞에 가져다 놓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동 변화를 촉구할 필요가 있을 때, 비유를 잘 활용해 보세요. 이는 모두를,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는 놀라운 실천을 이끌어 낼 것입니다.




<Your Plastic Diet> 캠페인 영상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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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Plastic Diet> 캠페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iuxHvAaZ2M



<Your Plastic Diet> Truth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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