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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로 커피 한 잔을

by 인플리

어느 평범한 출근날. 전 지하철 환승 후 플랫폼에서 빠른 하차를 하러 4-2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크린도어에 적힌 한 시 제목이 눈길을 끌었어요. <파이터의 퇴근>. 지나치며 첫 줄을 읽기 읽다가 어느새 멈춰서 끝줄까지 읽어 내려갔죠. 바로 이 시입니다.


봐봐요 / 두 발로 서 있잖아요
잘봐요 / 꼿꼿이 허리 펴고 있잖아요
거봐요 / 별일 아니랬죠
쓸모없었던 전장의 전리품 놔두고
문이 열리면 / “오늘! 웃겼던 일 말해줄까?”
마음의 여백만 집어 들고 / 가봐요


마음 한편이 찡했습니다. 퇴근길에 품는 복잡다단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요. ‘전장의 전리품’에선 일과 중 겪었을 다사다난한 감정이, ‘마음의 여백’에선 가족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염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느껴졌죠. 시를 읽은 후, 퇴근길 마음으로 출근하는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좋은 시는 그 시가 그리는 마음 한복판으로 우리를 순간이동 시키니까요.


이 시는 2024년 서울時지하철공모전 시민공모작에 당선된 송찬혁 님의 시입니다. 2011년부터 서울시는 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높이고, 시민의 참여로 문학 도시 서울을 만들어간다는 취지로 ‘시민 시인’을 발굴하는 공모전을 꾸준히 개최하고 있습니다. 공모전 포스터 속 카피도 인상적이에요. ‘승강장안전문, 당신의 시를 담은 커다란 시집이 되다!’. ‘시민 시인’을 만난 후, 누구나 ‘부캐’로 마음에 시인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시집을 정식 출간하지 않아도 잊지 못할 감정을 SNS에 글로 남기고, 소통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니까요.


이와 맥락이 같은 한 캠페인도 떠올랐습니다. 바로 커피 브랜드 율리어스 마이늘(Julius Meinl)의 <Pay with a Poem>입니다. 율리어스 마이늘은 186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커피 브랜드입니다. 유럽 최초로 로스팅 커피 판매를 시작했고, 현재 전 세계 70여 국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죠. 오스트리아 빈 커피하우스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지성사를 발전시키는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온 곳입니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이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격렬하게 토론하고, 영감을 나누고, 시대정신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율리어스 마이늘은 이러한 커피하우스의 가치를 현대에 소환하는 취지에서, 매년 특별한 이벤트를 엽니다. 바로 매년 ‘세계 시의 날’인 3월 21일, 제휴를 맺은 세계 다양한 도시의 카페, 레스토랑, 호텔 등에서 고객이 종이와 펜을 받아 직접 쓴 시 한 줄을 점원에게 제출하면, 커피 또는 차를 무료로 제공하는 이벤트죠. 2014년부터 무려 10년 넘게 지속하고 있어요.


이 캠페인은 기존 커피 광고의 문법을 깨서 새롭습니다. 커피 광고는 흔히 커피의 품질,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만족감에 주목해요. 어떤 좋은 원산지에서 얼마나 품질 좋은 원두를 썼는지, 그 원두의 향미를 어떤 최신 로스팅 기법으로 추출했는지, 커피의 향과 맛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를 모델의 감미로운 표정으로 전달하죠. 한 마디로, ‘커피 소비의 개인적 만족감’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율리어스 마이늘은 ‘커피하우스(카페)의 문화적 가치’에 주목해요. 카페가 숨 가쁜 일상을 버티게 하는 ‘카페인 연료 주유소’ 역할을 많이 기대받는 요즘, 계산대 앞에서 잠시 내면의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카페가 생각을 정리하고, 영감을 교류하는 창조적인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날만큼은 시가 화폐 역할을 합니다. 고객은 가장 효율적인 ‘지불’의 반대편에 있는, 비물질적인 ‘창작’ 행위로 커피를 거래하죠.


‘내 안의 영감’을 표현하는 경험의 가치는 2017년 공개된, 율리어스 마이늘의 캠페인 영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영상은 대행사 McCANN Bucharest와 협업해 제작되었는데요, 경찰, 기업가, 마술사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제작진과 이런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당신은 시인입니까?
아니요

당신은 시를 씁니까?
아니요


곧 제작진은 이들 각각에게 한 젊은 시인의 흥미로운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합니다. 흔쾌히 수락한 이들은, 곧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요. 사실 그 시는 각자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쓴 자작시였거든요. 당신은 시인이냐고 되묻는 제작진에게 한 출연자는 뭉클한 표정으로 답합니다.


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글을 썼으니,
저는 시인인 것 같아요

I wrote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so I guess I am a poet


캠페인 영상은 우리의 내면에 잠든 시인을 만나게 해줍니다. 이것은 거창한 문학적 재능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아요. 바쁜 일상에서 잊고 살기 쉬운 감정, 영감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의미하죠. 이 캠페인 덕에 커피는 속도의 연료에서, 고유한 창의성, 감성적 표현을 촉발시키는 영감의 연료로 전환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시인을 만나는 카페를 들러 보세요.




<Pay with A Poem> 캠페인 영상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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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y with A Poem> 캠페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TQG8MM61ng



<Pay with A Poem> Truth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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