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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을 한 다발의 위로

by 인플리

꽃은 오래도록 꺼내보고 싶은 기억을 선물합니다. 제게도 꽃 덕분에 특별해진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모 브랜드 광고 촬영을 했던 가을 날 즈음의 기억입니다. 그 촬영은 유난히 고되었습니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 때문에 하루 만에 영상 두 편을 찍어야 했죠. 타임 테이블에는 종료 시간이 다음 날 새벽 3시로 적혀 있었지만, 경험상 이마저도 ‘희망 종료 시간’이란 걸 직감했죠.


예상대로 자정이 넘어가는데도 찍어야 할 컷 수가 많았습니다. 촬영 장소가 집 근처였는데, 당장 집에 뛰어가 침대에 파묻히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잠을 쫓으려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면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 끝나고 톡 남길게. 잘자.’ 잠시 후, 마음 어딘가 찡해지는 답장이 왔습니다. ‘힘들 텐데 기운 내서 열심히 하는 모습 자랑스러워. 계속 응원할게.’


촬영은 결국 새벽 6시 반에야 끝났습니다. 총 24시간에 걸친 밤샘 촬영이었죠. 집에 돌아와 열 시간을 내리 잤지만, 피로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기운을 차리게 해줄 뜨끈한 국물이 간절했습니다. 남자친구와 자주 가던 쌀국수집에 가기로 했죠.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는데, 남자친구가 등 뒤에 무언가를 숨긴 채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가와서 슥, 내민 것은 분홍 장미와 아이보리색 소국이 담긴 작은 꽃다발이었어요. 순간, 혹시 기념일을 깜빡했나, 당황하며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이야?’. 남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날 아니야. 그냥 고생 많았다고.’


축하가 아닌, 위로의 의미로 꽃을 받은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유난히 화사한 꽃빛에 순간 울컥했습니다. 고된 촬영을 견디는 동안 제 마음은 온통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거든요. 그 폐허 속에서 작은 분홍빛, 아이보리빛 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차츰 제 색을 되찾는 듯했죠.


그 시기, 전 진로 고민으로 촬영이 특히 버거웠습니다. 생각하고, 글 쓰는 업무를 하고 싶어서 카피라이터가 되었는데, 실제론 촬영장, 편집실, 2D실, 녹음실을 오가며 영상 퀄리티를 끌어올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거든요. 만약 제가 광고대행사 제작팀의 팀장이라 할 수 있는 CD(Creative Director)가 되고 싶었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결과물을 만들어 가는 재미가 더 컸을 겁니다. 좋은 CD가 되려면 카피는 물론, 비주얼과 사운드에 대한 감각도 좋아야 하거든요. 촬영장은 그 모든 감각을 키우기에 최적인 현장이고요. 하지만 단 한 번도 CD가 되고 싶은 적이 없었던 저는, 촬영이 괴로웠습니다. 업계에 비슷한 직무 고민을 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 글쓰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다른 직무가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꽤 오래 외로웠어요. 마치 비바람이 불어도 꼿꼿하게 버티는 소나무처럼, 스스로에게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다그친 날도 많았고요. 그런데 남자친구가 건네준 꽃은 이런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무가 되고 싶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려 애쓰지 않아도 돼.
나무가 아니라고
꽃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원치 않은 일을 이렇게까지 해 온 건,
당연한 일이 아니야.
위로받아야 할 일인 거야.


그날 받은 ‘한 다발의 위로’는 평생 시들지 않을 기억으로 제 마음에 뿌리내렸습니다. 모두가 의지로 이겨내라고 다그치던 세상에서, 제가 기대어 의지할 곳을 찾은 느낌이었죠. 돌아보니 저는 광고 업계의 표준적인 시선으로 저를 재단했고, ‘CD가 되고 싶지 않은 카피라이터’를 스스로 별나다고 여겼어요. 사실 ‘팀장이 되고 싶지 않은 팀원’이 흔한데도 말입니다. 한 손으론 꽃다발을, 다른 한 손으론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쌀국수집으로 향하던 길, 그리고 집에 돌아와 꽃병에 꽃은 꽃을 바라본 기억은 제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꽃 덕분에 부서진 마음도 회복할 수 있었고요.


이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 광고가 있습니다. 바로 2017년 농림축산식품부와 이노션이 함께 만든 <꽃에는 힘이 있다>. 배우 이동욱 님과 임주은 님이 연인으로 출연한 영상 속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이것’은 마트에도 있고, 좋아하는 노랫말에도 있고, 해마다 구경 가자고 졸랐던 것이며, 무엇보다 바빠서 잊고 살게 되는 것이라고요. 남자는 답을 쉽게 찾지 못하지만, 시청자에겐 이미 보입니다. 그의 일상 곳곳에 ‘이것’이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요. 남자가 “특별한 건가?” 묻자, 여자는 답합니다. “특별해지는거지.”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똑같이 보낸 ‘이것’을 보며 환하게 웃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런 카피가 뜹니다.


평범한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꽃에는 힘이 있다


짐작하셨다시피 ‘이것’은 꽃입니다. 연약하고 여린 이미지의 ‘꽃’과 강하고 굳센 이미지의 ‘힘’이 합쳐지면서 뜻밖의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죠. 이 힘은 사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중요한 진실을 깨우쳐 줍니다. 바로 내가 본 아름다움을 소중한 사람에게도 건네고 싶은 마음, 즉 다정함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는 진실이죠.


<꽃에는 힘이 있다> 광고를 본 뒤로, 꽃을 든 사람을 보면 유독 시선이 머뭅니다. 언젠가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남성을 보았습니다. 삭막한 잿빛 타일 위에서 그분만 노란 핀 조명을 받은 것처럼 환해 보였죠. 아마 그 꽃을 받은 분도 하루 중 가장 화사하고 따뜻한 순간을 선물 받았을 것입니다. 진실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처럼 무심한 일상 속의 다정함으로부터 가장 명료하게 떠오릅니다. 그 여운을 간직한 채, 지하철을 타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꽃에는 힘이 있다> 캠페인 영상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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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는 힘이 있다> 캠페인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mF_BIC5lyY



<꽃에는 힘이 있다> Truth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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