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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Sep 23. 2016

그저 지금

달리는 것 외에는

가벼운 옷차림과 운동화.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관절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무엇인지 쉽사리 정의 내리지 못할 문제가 아직도 왼쪽 이마 언저리에 남아있었다. 오늘 내내 언어로 뱉어보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서 선선한 밤공기와 상쾌한 솔내를 채워본다. 핸드폰과 이어폰을 연결해 테마파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밴드의 음악을 재생시킨다. 종소리에 맞춰 양 팔을 흔들며 발을 내딛는다.


나는 그렇게 달리기 시작했다.


뭐가 바쁘다고 그렇게 살았을까.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아득한 광야가 떠올랐다. 모래를 씹는 듯한 매일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찾아왔다. 어느 것도 공급받지 못한 가슴팍은 쩍쩍 갈라졌으며, 입으로는 뿌연 먼지 뭉텅이만 뱉어냈다.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날들은 고역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작물을 갈아엎고 아무 기대도 없이 씨를 뿌리듯, 참으로 고역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어쨌거나 결국에는 이렇게 시원해질 것이었다.


한 바퀴를 돌았다.


일상 보다 약간 빠르게 흘러가는 주변의 느낌이 반갑다. 볼을 스쳐가는 바람을 주먹으로 잡아본다. 긴장했던 근육들이 자기 역할을 한다. 몸이 슬슬 달궈지는 것이 느껴진다.  왼발 다음에 오른발을 내딛는 단순한 동작에 집중할수록 몸은 가벼워진다. 은근한 조명을 따라 외곽으로 달린다. 향기가 느껴져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지만 그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다.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내뱉으며 걸어가는 누군가를 앞지르기 위해 길의 가장자리를 달린다. 속력을 조금 더 올려도 좋을 것 같다. 자박거리는 흙의 느낌이 발끝으로 전해진다. 비스듬히 기울어져있는 소나무가 머리에 닿을듯하다. 은근한 조명을 따라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을 밟으며 나는 더 아득한 어둠으로 스며든다.


두 바퀴를 돌았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한창 달릴 때 다섯 바퀴는 거뜬했는데. 시작점을 스쳐 지나가며 잠깐 고민한다.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 속도를 높인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인다. 팔 다리를 있는 힘껏 휘두른다. 분명 무슨 고민이 있었는데.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었는데. 왼쪽으로 커브를 돌며 몸을 기울인다. 방심하면 무릎이 꺽일 것 같아. 종아리와 허벅지가 경직되는 것이 느껴진다. 노래가 멈춘 사이 귀를 스치는 쉭쉭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와 거칠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공원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벤치에 앉은 커플은 이제야 일어나는구나. 겨우 침을 삼킨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이 머리를 아득하게 만든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무성한 솔잎 사이로 잔뜩 부풀어 오른 달이 보인다. 저걸 왜 이제야 봤을까.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뻗는다. 팔을 세차게 휘젓는다. 무언가 너에게 할 말이 생각났지만 소용이 없다. 그저 저 달을 바라보며 지금 달리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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