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Frame Nov 09. 2016

불편하게 기억하기

#32. 밀라노, 두오모를 기억하는 방법

모든 게 쉬워졌다.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할 필요도 없고, CD를 살 필요도 없다. 원하는 노래를 검색하고 재생시키면 그만이다.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던 편지와, 우표를 붙여서 빨간 우체통에 넣는 수고로움은 문자 메시지가 등장하며 자취를 감췄다. 궁금한 것은 검색, 필요한 정보는 캡처, 더 이상 주소와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결국 잊는 것마저 쉬워져버린 걸까. 그 옛날 노래 가사와 누군가의 삐삐번호는 아직도 남아있지만, 모든 것이 쉬워져버린 요즘은 너의 전화번호마저도 뿌옇고 희미하다.

15.01.14, 밀라노, 두오모

그래서 불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눈앞의 광경을 잊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쉽게 1/1000초를 찰칵할 때, 혼자 우두커니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2년이 다 돼가는 기억이 선명한 것이다. 밀라노의 많은 것을 보진 못 했다. 하지만 두오모로 충분하단 생각을 했다. 발그레한 대리석으로 덮인 외관, 그 빼곡한 첨탑과 조각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어렵게 익힌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쉽게 잊어서는 안될 것들이 이 세상엔 너무 많기에, 나는 너를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귤을 그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