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 클럽장님과 함께한 트레바리 '계보 없는 여자들' 클럽에서, '에밀리 디킨슨, 마녀의 마법에는 계보가 없다', '엘렌식수, 메두사의 출구'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에밀리디킨스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시를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종이다발에 글을 쓰고 그것을 실제본하여 파시클(fascicle) 이라 불렀다고 한다.
얼마 전 평일 낮 광화문 교보문고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에 들어갔다가 보기 드문 광경을 보았다. 나이 든 여자, 젊은 여자, 어린 여자들이 제각기 다이어리와 노트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있었다. (흔한 스타벅스의 풍경,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거나, 노트북을 펴놓고 공부하거나, 타자를 치는 사람들이 많이 안보였다.)
에밀리 디킨슨들이 여기에 다 모였네 이런 생각을 했다. 출판되지 않을 그림과 글들, 나만 간직할 목소리들. 그런 것들을 부지런히 쓰고 그리는 여자들이 서울의 대형서점 안에 가득 차있었다.
에밀리 디킨슨이 생전에 혼자 쓰고 엮어 간직하거나, 수전과만 교류했던 비밀스러운 시들의 에너지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그녀가 죽고 200년이 지난 후에도 시들은 살아남아있다. 에밀리 디킨슨은 알았을까? 자신이 가진 이 크고 높은 힘을, 멀리 가는 힘을, 기어이 2세기를 넘어 지구 반대편의 여자들에게까지 도달하는 힘을. 그녀의 시에는 광선, 신화, 역사, 신, 태양, 총알 같은 단어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크고 거대한 것들을 자신 안에 넣어두고 살려면 몸이 너무 비좁지 않았을까, 그래서 괴롭지 않았을까생각했다. 이 거대한 언어들을 그저 종이에 쏟아내고, 또 그저 그 종이를 실로 묶어내는 행위를 평생 했다는 것이 애틋하다. '조용한 열정'이라는 에밀리디킨슨의 전기영화가 있는데, 그 제목의 '조용'이라는 단어는 이 엄청난 침묵을 담기에는 부족한 것 같고, '열정'이라는 단어는 이 거대한 에너지를 담기에는 너무 평범한 것 같다.
에밀리디킨슨의 시가 발화되지 못한 거대한 은유로 가득 차서 그 점이 내게 폭발적으로 느껴졌다면, 엘렉식수는 그저 '폭발'이었다. 그녀의 글은 너무나 '불경'스러웠다. 읽다가 그녀의 출생 연도를 다시 찾아봤다. (세상에... 37년생이었다...) 내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모아보려고 노력하던 부서뜨리는 이야기, 해체하는 이야기, 그 모든 종류의 목소리가 이 안에 있었다. 이것은 연필이나 타자기로 종이에 쓴 것이 아닌, 육성으로 광장에 쓴 책 같았다. 가장 귓전을 얼얼하게 계속해서 호통치는 명령은 '글을 써라'라는 것. 그 목소리는 너무 크고 매서워서, 쓰지 않는 것이 죄악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혼나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히 하라거나, 나대지 말라거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거나,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거나.. 그런 호통이 아니고, 내가 사실은 이런 여자들한테 이렇게 혼나고 싶었다는 것을.
평생을 찾던 목소리, 호통, 내가 가진 분노, 욕망의 계보, 실수, 결점, 위대함,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이전 세대의 여자들 것과 같았다. 내 계보에는 엘렌식수가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이 있었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카타리나, 김혜순이 있었음을 깨달아버렸다. 스타벅스에서 혼자 앉아 아무도 보지 않을 종이 다발을 만드는 여자들의 계보에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 브이로그를 찍고, 공부하고, 놀고, 운동하는 여자들, 독서모임에 모여 이전 세대의 여자들 책을 읽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여자들의 계보에도 '그 모든 여자들' 있었다.
우리의 모임 이름은 '계보 없는 여자들'이지만, 끝내 계보를 찾아내어 그 이름을 부정하게 되어 기쁘다. 더불어 우리의 계보에 있는 과거의 여자들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이전 세대의 여자들이 나아간 만큼 나의 출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시대에 태어난 과거의 여자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주어졌다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 더 나은 걸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더 나은 걸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자신에게도 역시 책임감을 느낀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도 희미해지는 것 같다. 미래의 사람들과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도 더 나은 걸 주어야지. '다 망해버려..'와 같은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쉼보르스카는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르키메데스가, 예카테리나 여제가 청바지와 헌 옷을 입고 지금의 거리를 걸어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그 사람들 인지도 모르지. 정말로 그렇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의 여자들에게 여러 계보를 발견하고 싶다. 그 여자들은 '부산한 거리'에, 스타벅스에, 독서모임에, 인터넷에, 세상 어디든지 있을 것이다.
'부산한 거리에서 나를 엄습한 생각'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충분하다] 중
얼굴들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 아마도 제각기 천차만별이겠지, 이미 존재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것들도. 하지만 자연은-자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 끊임없는 노역에 지친 나머지 해묵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재활용해서 과거에 이미 사용했던 얼굴들을 우리에게 다시 덮어씌웠을지도 모른다.
청바지를 입은 아르키메디스가 당신 옆을 지나가고, 예카테리나 여제가 싸구려 헌 옷을 입고 다니고, 파라오 가운데 누군가는 서류 가방을 든 채, 안경을 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맨발의 구두장이가 죽고 남겨진 미망인은 여전히 소도시에 불과한 바르샤바 태생이고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린 거장은 손주들과 함께 동물원을 구경 중, 털북숭이 반달 족은 예술 작품에 심취하기 위해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
200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 5세기 전에 반세기 전에 전사한 사람들.
누군가는 황금 마차에 태워져 이곳에 왔고, 누군가는 대학살을 위한 수송 차량에 실려 여기에 왔다, 몬테수마, 공자, 네부카드네자르 그들의 유모들과 세탁부들, 그리고 세미라미스, 이들 중 유일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여인.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 나의 얼굴, 당신의 얼굴, 그리고 누군가, 당신이 결코 알 수 없을 어떤 인물의 얼굴, 어쩌면 자연은 우리에게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유지하기 위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연은 낚시질을 시작한다. 망각의 거울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건져 올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