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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Nov 07. 2020

서른넷에 다시 듣는 서른셋의 우울

2집 정규앨범 '나의 쓸모' (2013) - 요조

요조의 2집 정규앨범 '나의 쓸모'는 내가 27살이던 2013년에 발표되었다. 조곤조곤 속삭이며 일상을 예쁘장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기억하던 당시의 나는 두세 차례의 전체 듣기를 감행했으나 결국 위화감과 지루함으로 개인적 감상을 마무리했다. 그나마 그의 데뷔곡이었던 <My Name Is Yozoh>를 얼터너티브 사운드로 편곡한 '33 Years Old Ver.' 속 기타 리프가 들려주는 그루브에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앨범 단위의 '쓸모'를 찾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아쉬움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요조의 작품성을 탓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33이라는 숫자에 선명히 각인된, 그만큼의 세월의 무게를 짊어져 보지 못한 나의 편협한 식견을 나무랄 따름이었다.


어느덧 7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당시 33살이었던 요조를 앞지른 34살이 되었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 음악을 듣다 7년 전에 처음 조우한 이 노래와 다시 마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성격 문제로 고통을 겪는 나를 보니 나는 7년간의 세월 동안 나이를 얼마나 헛 먹어온 건지, 33살의 요조보다 하등 나을 것이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미묘한 감상이 하나의 결심이 되었고, 나는 오랜만에 다시 앨범 전체를 들어보기로 했다.


후딱 글을 써 재끼고 끝내려는 마음이 앞서가는 탓이다. 글 쓰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참을성이 없는 나는 아직 본 작의 진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다만 지금의 나에게 감정을 이입하고픈 탓인지, 이때의 요조는 가벼운 우울증을 겪고 있는 페르소나의 연기에 능수능란했던 것 같다. <나의 쓸모>와 <화분>에서는 나약한 자신의 무쓸모를 부모의 탓으로 넘기고, 아마도 누군가의 선물이었을 화분을 얼빠진 무기력과 증오에 찬 시선으로 대하는 화자를 통해 '적당히 인생 살기 싫은 냉소적인 바이브'가 느껴진다. 이어 아침부터 이불을 빨며 우울함을 이겨내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그저 시도에 그치고(<이불빨래>),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모습(<안식 없는 평안>)에서는 어떻게든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힘겨운 발버둥이 느껴진다.

2번 트랙 <화분> (출처: YouTube 'MAGIC STRAWBERRY SOUND')


상처투성이인 상대방과의 관계를 전면에 드러내는 <춤>을 기점으로 나의 집중력은 흐트러진다. 이 글을 하나의 평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개인사에 이입하는 반쪽짜리 형태로 글을 이끌어나가는 이유다. 하지만 앨범이 마지막 트랙에 자리한 <My Name Is Yozoh (33 Years Old Ver.)>에 이르는 순간, 지쳐 있던 집중력은 다시금 귀를 쫑긋 일으켜 세우며 평론의 본능을 자극한다. 원곡의 다정다감한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청자라면, 이 새로운 편곡이 가져다주는 전혀 새로운 기운에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번 트랙 <My Name Is Yozoh (33 Years Old Ver.)> (출처: YouTube 'MAGIC STRAWBERRY SOUND')

원곡에 비해 담담하게 노래하는 요조의 목소리는 갖가지 원색을 나열하는 가사의 내용과 극명하게 갈릴 정도로 채도가 옅은 인상을 준다. 마치 원곡이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의 발랄함을 닮았다면, 후자는 온갖 산전수전을 겪고 인생에 지친 대리급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우리는 그가 마냥 목소리에 힘을 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힘을 주어 완급을 조절하는 미묘한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도 있는 정말 미묘한 느낌이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래도 어떻게든 삶을 지속해 나가려는 희미한 미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겹고 고단한 삶이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나직이 약속하는 모습. 33살의 요조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34살이 되어버린 나이지만 여전히 이 앨범의 쓸모는 명확하지 않다. 이지리스닝으로 듣기에는 단조롭고, 우울한 감정에 시선을 맞추기에는 그 깊이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 앨범이 정확히 나의 심드렁하고 까칠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나의 현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쓸모'보다는 '가치'를 논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꼭 쓸모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앨범 덕택에 이렇게 또 하나의 글을 기어코 완성한 것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쓸모를 다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서른넷을 지나 서른다섯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나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푸는 기분으로 종종 이 앨범을 상기하고 찾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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