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칠마루 Jan 31. 2024

주말이라고 놀지 않아요

신축 건물 지하 4층에서

토요일 저녁이었다. 오후 6시가 넘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그때쯤이면 출동을 담당하는 소방서와 안전센터에서는 이른 저녁을 먹었거나 곧 먹을 시간이었다. 아님 막 배달 온 볶음밥이나 돈가스 포장을 풀어헤치고 한 입 베어 무는 그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갑자기 클래식 음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벨소리이길 바랐지만 내 귀는 이 소리가 정확히 어떤 소리인 줄 구분해 냈다. 화재출동 벨소리였다. 머리로는 다른 벨소리이길 바라면서도 몸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무전기와 스마트 경보기(화재현장에서 가만히 있으면 쓰러진 걸로 간주하고 큰 소리가 울림, 위치 추적기능도 있음)를 집어 들고 웹패드(일종의 내비게이션으로 출동 지령과 각종 재난 정보, 현장까지의 출동경로를 나타내는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음, 갤럭시 탭)를 챙겼다.


나를 비롯한 우리 팀원들은 모두 각기 맡은 역할에 따라 제각기 바빴다. 난 5톤 펌프차(화재 시 대응하는데 1순위로 필요한 차, 4~5명이 타며 화재, 구조, 펌뷸런스, 생활안전 출동을 담당한다, 얼마 전 특수차(굴절사다리차, 고가사다리차, 무인파괴방수차, 화학차 등) 중 굴절사다리차를 담당하다 이번 1월에 펌프차 운전원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운전원이어서 헬멧과 방화복 상의만 입으면 되었다. 하지만 팀장님을 비롯한 다른 경방대원(공기호흡기를 메고 화재현장에 불을 끄는 대원, 펌프차 운전원은 차량 운전, 화재진압용 펌프 조작, 소방용수 관리를 맡는다) 4명은 차고로 뛰어가 방화복을 입느라 바쁜 상태였다.     


내가 있는 센터에서 화재현장까지의 거리는 약 1.5.km로 신호위반을 하고 주변 차량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3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만 좁은 골목에 여러 음식점들이 밀집된 장소에서 불이 나 소방차를 화재현장에 가깝게 배치할 수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건 온전히 차량을 운전하는 내 몫이기에 화재 현장이 가까울수록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조수석에 탄 30년 경력의 팀장님이 도와주셔서 수월하게 불이 난 건물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신축 중인 건물의 지하 4층에서 불이 난 것 치고는 현장에는 별다른 연기나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상황실의 무전을 들어보니 건물 관계자 두 명이 지하 4층에서 소화기로 직접 불을 끄는 중이라고 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의 출입구는 2곳이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고임목으로 차의 뒷바퀴를 고정하는 사이 팀장님과 3명의 후배는 그새 지하층의 출입구를 찾아 어느덧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펌프차가 처음으로 화재 현장에 도착했고 몇 분이 지나자 인근의 센터에서 지원 온 차량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화재현장을 지휘하는 지휘차(스타렉스), 화재조사관이 타고 있는 조사차(스타렉스), 6000리터 물이 있는 물탱크차는 커서 왕복 4차선 도로에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센터의 펌프차 1대가 도착했다. 자체 진화가 됐다는 무전으로 인해 그리 많은 차가 출동하지 않았다. 불이 한창 나고 있었다면 소방차량이 적어도 20대 이상은 출동했을 터였다.      


승용차 2대가 간신히 지나갈 골목에는 이미 주차된 차들로 만석이었다. 화재현장 바로 앞에는 마라탕 가게, 노래방, 고깃집 등이 즐비했다. 토요일 저녁 갑자기 출동한 소방차를 보며 주변 음식점 사장님들은 불이 그리 크게 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언제쯤 우리가 철수할 건지를 수시로 물어봤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모습이 내심 못마땅하기도 했다. 얼른 비켜드리고 싶었지만 불은 꺼야 할 게 아닌가? 입장에 따라 사람 마음은 수시로 바뀌니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소방차가 길을 막고 있으면 손님들이 오지 않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관리자가 자체 진화했다는 상황실 무전과는 달리 10분 전 내려간 팀장님은 혹시 모르니 지하 4층까지 연결할 수관(소방호스)을 미리 준비해 달라는 무전을 남겼다. 얼른 계산해 봤다. 지하 4층까지라면 15m인 수관을 10벌 정도 연결하면 충분할 거라 예상하고 먼저 수관 2벌만 눈에 보이는 지하층 입구 앞까지 펼쳐 놓았다. 그리고 지하층 입구에서 수관을 가지러 올 대원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혹 지하 4층에서 연기가 나고 있어 확인 중이라는 무전만 들릴 뿐이었다. 나를 비롯한 지휘차, 다른 센터 펌프차 운전원 총 3명만 화재 현장 주변으로 진입하려는 차량을 통제하고 “어디에 불났어요?”, “언제 끝나요?, 빨리 끝나야 되는데”라고 말하는 주변 상인들과 행인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지금 확인 중입니다”라는 대답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참 난감했다. 안의 상황을 모르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어보니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쯤 지나 잔화정리를 마치고 대원들이 복귀했다. 그 뒤 알게 된 경방 대원들의 활동내역은 다음과 같다. 지하로 진입하니 건물 관계자들이 소화기를 몇 개나 썼는지 매캐한 냄새와 소화약제로 시야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했다. 건물 관계자는 지하로 내려온 소방관을 보고는 자기들이 소화기로 불을 다 껐으니 얼른 확인해 보라고 하고선 자리를 비켜섰다. 그런데 30년 경력의 팀장님은 그 말을 듣고서도 일부러 지하 4층을 천천히 둘러보셨다. 불을 꺼보지 않은 관계자들의 말을 100%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소방관인 우리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불이 제대로 꺼졌는지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관계자들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하 4층 구석에는 그라스울(건물 공사 시 보온재로 쓰임)이 잔뜩(약 30제곱미터) 쌓여 있었고 거기서 담배연기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부터 경방 대원들의 활동이 펼쳐졌다.      


공사장에는 임시 소방시설을 설치하게끔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중 경방 대원들은 간이소화장치(일종의 소화전으로 20분 동안 분당 65리터의 물을 쓸 수 있다)를 활용해 펌프차에서 수관 10벌을 연장하지 않고서도 불을 끌 수 있었다. 지하 3층과 4층에 있던 간이 소화장치에서 물을 뿌리고 나머지 3명은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는 그라스울을 손으로 일일이 다 들춰내었다.  


공사장에 있는 간이소화장치(출처 : 네이버)


당시 현장은 겉보기에만 멀쩡했을 뿐 그라스울 몇 개를 들어 올리자 담배처럼 속으로 타들어가는 불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명은 물을 뿌리고 세 명의 대원은 계속 물먹은 보온재(생각보다 무겁다, 더구나 방화복에 공기호흡기까지 메고 작업을 하니 더 힘들었을 듯)를 걷어내는 작업을 1시간 가까이 하고 나서야 모두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신 대원들의 방화복엔 먼지와 검댕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온몸엔 불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이 지하 4층에서 그라스울과 신나게 싸우는 사이 난 밖에서 추위와 싸웠다. 맡은 역할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화재 진화 작업을 마치고 모두 환하게 웃으며 1시간 만에 일이 마무리된 것을 감사히 여겼다. 관계자들이 소화기로 불을 끄지 못했다면, 조금이라도 신고가 늦었다면 아마도 그날 뉴스에 100% 나왔을 것이고 활동시간은 최소 5시간을 넘겼을 것이었다. 정말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화재 현장으로 들어간 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무전이 없어 혼자 마음 졸이던 것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건 나 혼자만 아는 걸로...  

매거진의 이전글 추울 때는 고드름 제거가 딱이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