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목포 여행기
목포를 가기로 했다
1달 전에 목포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둘 다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아내가 목포를 가자고 말했다. 그동안 목포는 전라남도의 작은 도시일 뿐이었다. 그러다 작년(2019년) 목포가 정치적 이슈의 한가운데에 휘말리고 나서 목포에 ‘조금’ 관심이 생겼다. 무려 백 년도 전인 1897년 개항으로 항구도시 목포의 발전이 시작되었고, 현재까지도 근대문화유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가까운 언젠가 사진기를 들고 목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보기 어려운 근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테고, 수산물이 오고 가는 항구도시에 전라도여서 음식 걱정할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흑산도 홍어를 먹고 싶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내렸다. 작은 역이다. 선로를 따라 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 ‘호남선 종착역(湖南線終着驛)’이라고 쓰인 표지석을 만났다. 서울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2시간 30분 남짓이면 목포에 도착해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목포까지 지나는 ‘남행열차’의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가 묵은 숙소의 이름은 ‘에스타시옹 1913’. 에스타시옹(Estacion)은 스페인말로 기차역, 1913은 목포역이 개통된 해로 1913년에 개통된 목포역을 뜻한다. 한반도의 끝 목포역에서 유럽의 끝 이베리아 반도까지 기차로 다시 달리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간중간 내리면서 걷고, 먹고, 마시고 다시 기차를 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가고 싶어 졌다. 아마도 은퇴를 했을 20년 후에는 목포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alh6qQiu4Rk
120년 고전미 옛 목포 일본영사관
숙소에 짐을 풀고 걷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 지도에 40곳을 표시해 왔는데, 그냥 걸어도 충분했다. 이쪽으로 걸어가면 무언가 나올 것 같아서 걸었는데, 목포에 오기 전 가장 궁금했던 옛 일본영사관이 보였다. 옛 일본영사관은 근방 어디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다. 주변보다 높은 언덕에 세워지기도 했고, 붉은 벽돌을 단단하게 쌓아 일본풍 지붕을 얹어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근대건축인 데다 보존상태도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한다.
1897년 개항 이후 목포에 외국인이 거주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곳을 ‘개항장’이라고 하는데 개항장의 가장 중심부에 일본영사관이 들어섰다. 일본영사관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건물은 1900년에 지어져 120살을 먹었다. 잘 보존되어서 건물 상태가 좋고,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안을 관람할 수 있다. 표를 사고(유료다) 체온을 재고 방문 기록을 남기고 들어가니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중간중간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를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이 건물을 지을 때 오랫동안 사용하려고 정성을 다한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는 목포부청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목포시청, 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을 거쳐 2014년부터 목포 근대역사관 본관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전쟁과 압축성장의 시기를 무사히 잘 넘겼다. 공공의 영역에서 사용해 온 건물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목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허물자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한국전쟁 때도 포탄을 맞지 않았고, 총탄 자국만 남았다고 하니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운도 꽤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2019년에 방영된 드라마 <호텔 델루나>의 촬영지였다. 드라마를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규모가 클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화면으로 보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규모가 작다고 실망하지는 말자. 드라마 제작진이 잘 찍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일코 이애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보고, 그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훔쳐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다. 목포를 향한 이유 중 하나가 음식 선택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든든한 믿음 때문이었다. 목포는 항구도시로 발전했고, 오래전부터 신안·진도와 같은 서남권 바다에서 잡히는 수산물이 모여들었다. 신선한 식재료와 음식의 중심을 지키는 소금이 풍부한 ‘맛의 도시’이다(맛의 도시라는 표현은 목포시 홈페이지에서 빌려왔다).
목포시는 지역의 대표 음식 9가지를 선정해 ‘목포 9미’라고 알리고 있다. 9미는 홍어삼합, 세발낙지, 민어회, 꽃게무침, 갈치조침, 우럭간국, 병어회(찜), 아구탕(찜), 준치무침이다. 아, 그런데 일정은 1박 2일. 첫날 점심과 저녁, 다음 날 아침·점심·저녁까지 모두 다섯 번. 선택을 해야 했다. 가장 먼저 홍어삼합을 골랐다. 내가 두 번째 음식으로 민어회를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 ‘제철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바로 수긍. 내년 여름에 다시 와서 먹겠다고 마음먹었다(민어는 6월부터 8월이 제철이라고 한다). 이어서 갈치조림과 꽃게무침, 떡갈비를 골랐고, 이틀째 아침으로 방송 프로그램으로 나와 유명해진 해장국집을 골랐다.
첫날 점심에 먹은 갈치조림은 예전에 엄마가 해주던 맛이었다. 달지 않고, 간이 강하지 않아서 좋았다. 시래기와 고사리를 넣은 것이 독특했는데, 고사리가 맛있었다. 갈치조림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식당에 갔는데, 이 식당은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하다.
홍어집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덕인집’으로 향했다. 2018년 박찬일의 책 『노포의 장사법』에서 덕인집을 만났다. 목포에 가게 되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오래된 가게다. 택시를 잡고 덕인집에 가자고 하니 택시기사가 묻는다.
“인터넷에서 봤습니까?”
“인터넷은 아니고 어떤 책에서 봤습니다.”
“그 집이 원래 홍어집이 아니고 막걸리 내던 주점, 덕인주점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연세가 있는 분이다.
“우리는 비싸서 (홍어는) 시장에서 사 먹습니다. 그래도 목포 오셨으니 흑산도 홍어 한 번 드시는 것도 좋죠.
덕인집은 정확한 개업 일자를 알지 못하고 ‘1980년대 초에 창업했다’고 추정하는 오래된 가게다. 택시기사 말처럼 홍어집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안주를 팔면서 같이 취급하다가 홍어 전문점으로 알려졌다.
저녁 6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이 아무도 없다. 자리에 앉아 홍어삼합을 시켰다. 조금 있다가 몇 가지 반찬과 홍어애가 나왔다. 고춧가루를 섞은 소금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으니 고소하다. 아이고 고소하다 하고 있는데, 삭힌 홍어회와 삶은 돼지고기, 그리고 묵은지가 나왔다. 가운데에 보지 못한 무엇인가가 올려져 있다. 잎에 넣고 씹어보니, 조금 딱딱한 물렁뼈가 씹힌다. 이게 혹시 ‘일코 이애 삼날개 사살 오뼈’할 때 그 홍어 코인가 궁금했다.
포스터 속 송가인의 “가인이는 잎새주 이어라”라는 말에 소주도 한병 시켰다. 홍어와 돼지고기에 묵은지를 싸서 막걸리를 한잔, 홍어회만 먹을 때는 잎새주를 한잔. 목포여서 그랬는지, 덕인집에서 먹어서 그랬는지, 흑산도 홍어를 먹어서 그랬는지, 삭힌 홍어 냄새가 지금껏 먹어본 중에서 최고였다. 얼추 다 먹었을 때쯤 주인 할머니가 자리에 왔다.
“입에는 잘 맞어라?”
“맛있습니다.”
“우리 집은 암치만 써서 맛이 좋을 것이요.”
가운데에 올려져 있던 보지 못했던 그것은 ‘일코’할 때 홍어코가 맞았다. ‘일코’와 ‘이애’는 먹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겠는데 ‘삼날개 사살 오뼈’를 구별하지 않고 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 또 오는 수밖에. 그때는 할머니한테 어떤 부위인지 물어야겠다.
목포는 짠내 나는 항구다
홍어를 먹고 숙소까지 걸어갔다. 목포 원도심은 그리 넓지 않아 걸어 다닐만하다. 그런데 해가 지면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다 보니, 지방은 사람이 없고 텅텅 비어 간다. 목포 원도심에서도 “임대”라고 써붙인 공실을 자주 볼 수 있다. 돌아다니다 ‘확장 이전했다’는 반가운 안내문을 봤더니 반려동물 용품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자식들을 객지로 보내고 난 뒤 ‘빈 둥지’가 허전한 어머니, 아버지들이 반려동물에 외로움을 위탁하고 있는 것인가.
바다를 옆에 두고 해안을 따라 걸었다. 아직 시간은 저녁 8시 30분인데 깜깜하다. 어둠 속에 저 멀리 환한 빛이 보인다. 빛에 가까워질수록 묵직한 비린내가 코에 진득하게 들러붙는다. 전등에 의지해 그물에서 생선을 떼어내고 있다. 살짝 보니 조기다. 요새 목포에서는 조기가 많이 잡힌다. 그물에 달라붙은 생선을 걷어내는 일당도 세서 할머니들이 1시간에 1만 2천 원까지 받는단다. 며칠 전에는 그물을 걷어올리다 배가 뒤집혀 선장이 죽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고 들었다. 어두운 밤 생선 걷는 모습을 보며 목포가 항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목포는 묵직한 비린내가 가득한 항구고, 비린내는 땀냄새를 품은 사람 사는 짠내다.
조선쫄복탕과 목포 빵집
맥주 몇 캔과 와인을 사서 숙소에 돌아왔다. 손님이 우리 밖에 없어서 마음껏 떠들며 놀았다. 다음 날 숙취에 머리가 지끈. 전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해장하려면 조선쫄복탕이 좋다”는 추천에 짐을 챙겨 나갔다. 식당 이름도 ‘조선쫄복탕’. 음식 이름을 바로 가게 이름으로 사용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쫄복은 우리나라 연안에서 서식하는 복어의 한 종류다. 복어 중에서 크기는 작지만 독성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독한 녀석이라고 한다. 간판에 이름을 올릴 정도인 쫄복탕은 뚝배기에 미나리를 얹어 팔팔 끓는 상태로 나온다. 양념 부추로 간을 맞추고, 식초를 넣고 한숨 식기를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어라, 걸쭉하다. 어리둥절했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니 ‘어죽’이라고 적혀있다. 뼈째 푹 고아내 걸쭉한 것인지, 전분가루를 풀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씨원’했다. 한 뚝배기 비우고 나니 숙취도 가시는 듯했다.
해장의 완성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국 5대 빵집으로도 꼽힌다는 코롬방제과점에 들어갔다. 1층은 제과점, 2층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코롬방제과점은 1920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목포 최초의 서양식 제과점이 전신이라고 설명한다. 1949년 한국인(정병조)이 인수해 코롬방제과점을 개업했다.
역사가 꽤 오랜 제과점인데 긴 역사만큼 사연도 많다. 가까운 곳의 다른 제과점(씨엘비 베이커리)과 대표 메뉴를 두고 서로 원조 논란을 벌이고 있다. 친족 간 분쟁인가 싶은 생각에 검색을 해보니 맞았다. 두 제과점의 대표 메뉴는 새우바게트와 크림바게트. 소스의 양과 맛, 그리고 빵맛이 다른데 어디가 더 맛있다고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빵을 좋아한다면 둘 다 맛을 보자. 밥 배와 빵 배가 따로 있고, 5분 걸으면 빵 배는 그만큼 새로 여유가 생기는 법이니까.
잠깐 다른 이야기로 새면, 시엘비 베이커리 매장은 붙어있는 건물 2개의 1층 벽을 터서 매장을 만들었다. 목포 원도심에는 이처럼 벽이 붙어있는 맞벽건축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건물 사이를 띄우는 건축물에 익숙한 눈에는 독특하게 보였다. 위험할 수 있겠지만, 붙어있는 건물이 거리를 띄운 건물들보다 예쁘다고 느꼈다. 건물 사이 공간을 볼 때 양치질하면서 거울에서 확인하는 군데군데 벌어진 이빨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저분하기라도 하면 마치 치석이 쌓인 것 같은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다.
갈비를 조슨 후 간장 양념을 찌그려 구운 목포식 떡갈비
둘째 날 일정을 늦게 시작해서 마음이 급했다. 해장을 해서 든든해진 배를 빨리 꺼뜨리고 싶었다. 동명동77계단을 찾았다. 원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송도신사로 향하던 계단이었다. 동네 앞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원래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송도라고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소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벗나무를 심은 뒤 정상부에 송도신사를 만들어 강제로 참배를 강요당한 슬픈 역사를 함께 한 분들의 아픔을 기리고 후세들이 오욕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알리려고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77계단이라는 이름은 계단의 숫자가 77개여서 붙었다고 한다. 이 동네는 작은 집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목포에는 개항 이후 만들어진 골목길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동명동 77계단 마을의 골목길이 가장 복잡하다고 한다. 근대 이후 목포 지역에서 자연 발생한 동네 구조와 가옥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동명동77계단에서 유달초등학교로 향했다. 이곳에는 1929년에 지어진 옛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강당이 있다. 심상소학교는 목포에 살던 일본인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다. 목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건물로 당시 강당 건축의 특징이 잘 남아있다. 본관 복도에 한국 토종 호랑이 박제가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안을 들어가지 못해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항구도시답게 목포 9미에는 수산물만 포함되어 있지만, 소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도 별미다.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란 역사학자 최성환은 ‘지금은 수산물 요리가 대세이지만, 과거에는 영양보충이나 회식에 고깃집이 더 인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주변 섬사람들이 목포에 나왔다가 들어가기 전에 고기로 영양을 보충하고 가는 경우가 많아 고깃집도 많았다는 것이다.
최성환이 책에서 추천한 목원동 영암갈비를 찾았다. 떡갈비가 아닌 생갈비를 주문했더니 생갈비는 미리 예약을 해야 먹을 수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생갈비는 한우, 떡갈비는 육우를 사용한다. 떡갈비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목포식 떡갈비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간 다음에 양념을 넣고 치대서 동그랗게 만드는 ‘떡갈비’와 다르다. 갈비뼈에 붙어 있는 고기를 다진 후 간장 등으로 만든 양념에 재워서 연탄불에 직화로 구워서 내준다. 조리법은 사투리로 표현해야 그 맛이 더 살 것 같다. 갈비를 ‘조사 버린’ 다음에 간장 양념을 ‘찌그려서’ 연탄불에 구워낸다. 떡갈비는 달착지근한 양념과 고기의 육향이 잘 어울렸다. 함께 챙겨준 밑반찬도 좋았는데, 밴댕이 젓갈이 무척 맛있었다. 밴댕이 젓갈을 먹느라 공깃밥을 두 공기나 비워냈다.
여행을 다녀온 주말에 갈비찜용 갈비를 주문해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은 후 알게 된 것들. ‘조사버리다’라는 말은 고기를 잘게 다진다는 말인데, 생각보다 더 많이 다져야 한다. 요리 실력이 부족해서 그랬겠지만, 간장은 생각보다 덜 사용해도 되고 설탕은 정말 많이 넣어야 단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팬에 구워서는 연탄불과 같은 직화구이의 불향과 불맛을 이길 수 없다. 직화구이는 진리다.
삼학도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택시를 타고 삼학도를 향했다. 삼학도는 원래 섬이었는데, 도로가 연결되고 공원이 조성되었다. 유람선을 탈 수도 있고, 포장마차촌도 만들어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 목포를 방문했다면 어린이바다과학관을 방문하면 좋다. 그리고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해 2013년에 개관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목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대중은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지만, 정치적 고향은 목포라고 할 수 있다. 목포 시민은 1963년과 1967년 김대중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1967년 선거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목포를 방문해 여당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운동을 펼쳤는데도, 목포시민은 압도적으로 김대중을 선택했다.
20여 년 전 1997년에 치러진 15대 대통령 선거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한나라당 이회창, 국민신당 이인제, 국민승리21 권영길 등이 후보로 출마했다. 여당에서 이인제 후보가 갈라져 나가 이번에는 ‘혹시’하는 기대가 있었다. 12월 18일 저녁 6시 개표방송을 시작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 전주에 내려와 있던 나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대학생들은 누구를 지지하냐?”
그때는 정치상황 등을 잘 몰랐던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시절. 그리고 97년 겨울에는 학생운동하는 선배들이 감옥에 많이 갔고, 학교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1학년(97학번)들은 방치된 상태였던 기억이다. 선배들이 누구를 지지하는지 잘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권영길이를…”.
“정신 나간 놈들, 대학생들도 정신이 나갔구먼.”
대학생들은 당연히 김대중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김대중 대통령을 간절하게 바라던 전라도 사내에게 개표방송 시작 전부터 초를 치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개표 시작 후 줄곧 이회창 후보가 앞서 나갔다. 개표 시작 4시간이 지난 오후 10시, 김대중 후보가 역전했다.
“맥주 사 오고, 통닭도 시켜라.”
아버지가 긴장한 얼굴로 지갑을 꺼냈다. 형제들은 통닭을 맛있게 먹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술을 적당히 먹으라고 핀잔을 줬다. 다음 날 아침, 전라도 사내는 밤을 꼬박 새운 것 같았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득표율 40.3%, 이회창 후보와의 득표수 차이는 390,557표. 3위 이인제 후보의 득표수는 4,925,591표였다. 말 그대로 신승이었다. 김대중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최초의 평화적인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기념관은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 ‘김대중과 노벨상’, ‘사형선고와 정치 테러 등 김대중의 정치역정’,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의 동반자들’,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 김대중이 남긴 정치적 유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호불호는 별개로 하더라도 기념관은 짜임새 있게 꾸려져 있다. 무엇보다 정치인 김대중의 삶, 그의 인생 콘텐츠가 탄탄하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더불어 전시관 기획자들의 기획력도 ‘볼거리가 풍부한’ 기념관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은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와야 할 곳이기도 하다.
꽃게살 무침과 병어회무침
목포 주변 진도군 서망항은 꽃게로 유명하다. 목포에서는 꽃게의 부드러운 속살을 발라서 비빔밥으로 먹는 ‘꽃게살 무침’이 유명하다. 꽃게살 무침은 꽃게 살을 발라낸 후,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버무려서 낸다. 꽃게는 맛은 있는데, 사돈 앞에서 먹지 못할 음식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입에 넣기가 쉽지 않다. 그 수고를 덜어줘서 좋기는 한데, 껍질을 쪼개고 씹으면서 먹는 맛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침 식당을 방문한 날 병어회무침이 있어서 함께 주문했다.
꽃게살무침과 병어회무침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으로 2020년 11월 목포여행이 끝났다. 내년 여름에 목포에 한 번 더 와야 한다. 민어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홍어도 또 먹어야지.
참고자료
최성환, 2020, 『목포-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21세기 북스
김주미, 2016, 『목포 여행 레시피 - 우리나라 구석구석 즐거운 소도시 여행』, 즐거운상상
박찬일, 2018, 『노포의 장사법 - 그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나』, 인플루엔셜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