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없는 질문에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나라고 표현하는 '나'는 무엇일까?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는 것의 정의는 무엇일까?
이미 과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하지만
나는 데카르트가 쓴 책을 보지 못한 덕분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아직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에 한 번쯤을 던져볼 만한 질문
'나'는 무엇일까?
첫 번째 나
내가 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로 쪼개본다
나라는 관찰자와 나라는 관찰대상자가 존재해야 하고
이 두 개가 서로 엮어 있으면 내가 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
관찰자와 관찰대상자라는 상대적이지만 하나로 묶여있는 상태
그럼 나(관찰자)가 나(관찰대상자)를 인지하면서
내가(관찰자)나를(관찰대상자)를 알아차릴 수 수 있는 상태
여기사 나(관찰자)는 인지/의식이고
나(관찰대상자)는 인식/무의식 이다.
두 번째 나
나는 존재하는가를 정의해 보면 어떨까
존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실체가 있다.
실체가 있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것이고 힘은 곧 영향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내가 나라고 하는 '나'는 신체 중 특정기관으로 콕 짚어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고 믿고 또 힘이 있으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상태가 가능하려면 두 가지 성질을 중첩시키면 된다.
파동의 성질이 입자적 특성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파동은 입자가 아니다. 하지만 입자가 아닌 파동을 입자의 성질을 띄게 하려면
극저온의 결맞음상태에서 파동이 저항성을 최대치로 올라가는 형태를 보이면
입자는 아니지만 저항성이 최대치인 입자상태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성질은 파동이지만 특성이 입자 같은 그런 모습을 띄는 구조는 원운동의 구심점이다.
원운동의 구심점이 바로 '파동의 입자성을 띄는 나'는 아닐까
세 번째 나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제목을 생각해 보면
프렉탈 구조에서 부분은 전체에 영향을 주고 전체는 부분에 영향을 준다.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이다. 부분과 전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길게 이어진 끈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우주 전체의 나의 부분적인 나이다.
나는 내 전체의 나이자 우주의 부분적인 나이다.
우주라는 기준에서 바라보는 상대적인 나는 부분이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내 기준의 나는 절대적이며 전체적인 나이다.
나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이다. 나는 전체적이며 부분적이다.
어쩌면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지구전체에 흩어진 수많은 나와 연결되고
그 수많은 나들이 나와 같은 나라고 한다면
나는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수많은 나들이 경험하는 경험들(고통, 환희, 그리움, 고독함, 회의적, 허탈감, 등등)
수많은 감정들의 소용돌이를 동시에 경험할 텐데...
어쩌면 수없이 많은 나들이 사실 통합된 하나의 나라고 해도
통합된 하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개체가 온전히 그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내가 존재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36조 개의 세포들이 모여 통합된 하나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36조 개의 세포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나로 봐야 하는 가
결국 36조 개도 나고 통합된 나도 나이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고 전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36조 개의 세포도
하나하나가 각자의 '나'가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원운동(순환의 고리)으로 만들어진 '파동의 입자성'이라는 이름의
구심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