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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Jun 03. 2016

묻지마 원인

모든 병이 신경성은 아니잖아?



 몇 주째 위통을 앓고 있다. 처음엔 명치만 은근히 뭉치더니 이내 긴 공복을 통과해도 허기지지 않았다. '아프니 병원에 가자.' 보단 '아파도 알아서 낫겠지.'라는 태평주의라 위에 불편함을 담고도 계속 묵혔다. 오후엔 풀리겠지, 내일은 낫겠지. 그러다 정말 이러단 사달 난다, 느낀 계기가 찾아왔다. "저녁에 고기 먹자"는 언니의 말에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권태란 없었으므로 이는 분명한 이상 징후였다. 나는 그날 저녁 집에 남아 된장국과 밥을 먹었다. 인적이 식은 집에서 혼자 국이나 떠먹는 청승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떡해. 고기가 안 먹고 싶은데.



 뻗대다 못해 동네 내과 의원에 갔다. 복부 사방을 얼추 쑤셔 보더니 아프냐 묻는다. 그럼. 위 부근이 온통 아프다고 대답했다. 


-글쎄요, 뭐 신경 쓰는 일 있어요?

-네? 네. 당연히 스트레스가 없진 않겠죠?


 병명을 지레 예감하고 짜증이 나서 나도 되물었다. 스트레스 없이 태평천국에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렇게 내게 떨어진 병명은 <신경성 위염>. 자가 진단으로 이미 골백번도 더 내린 병명이 불쑥 내 것이 되자 상심했다. 결국 의사도 주인 없는 말을 뱉고야 말았구나. 신경성 질환의 치료법은 고작해야 신경 쓰지 말라, 일 텐데, 이는 상사병을 앓는 이에게 상사하지 말라, 향수병을 앓는 이에게 향수하지 말라, 는 말과 도저히 다른 군데가 없어서 속 빈 말이었다. 결국 나는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을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아,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을 약사에게 신경성 위장약을 조제받아 왔다. 거리의 걸음은 신경성 질환자들의 행진이었다. 착시일까.



 문제의 원인은 숨어 있다. 부지런을 떨어야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원인을 찾지 않음은 나태해서이기도 하고, 원인을 찾은 이후 분주히 이동해야 할 다음 단계가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위 두 이유로 원인 규명은 얼렁 덜렁 얼버무려진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살인이 알려준 사회 문제는 여성 혐오였다. "여자가 날 무시해서 여자가 올 때까지 화장실 칸막이 참호에서 대기 중이던" 사건의 맥락은 이렇듯 명징하다. 그렇다면 원인은? 한반도 통사를 관통하는 양성차별의 굵은 맥일 것이다. 그래, 다행히도 여전히 생명 부지하는 나태하지 않은 다수가 이 원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원인을 찾은 이후 분주히 이동해야 할 다음 단계를 꺼리는 이들'이 제동을 걸었다. 그건 원인이 아니야! 여성 혐오라 단정 짓지 마! 조현병 환자 개인의 미친 짓거리일 뿐이야!




 진단이 양성차별로 나왔다면 치료는 차별의 역차별이 아닌 차별의 완화다. 그리고 '분주히 이동해야 할 다음 단계'가 바로 이 차별의 완화다. 이것이 두렵고 꺼려지는 자들은 어떤 차별에도 무감한 무신경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차별은 과연 정당하며,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날뛰는 용맹을 지닌 자들인가. 이들은 원인을 단순히 "여자들의 신경성"이라 진단 내린다. 



 신경성의 주사는 안정제다. 안정제나 진통제를 치료제로 볼 수 있을까. 이들은 원인의 정면을 돌파하지 못한다. 우회해서 돌격하지도 못한다. 그냥 잠재울 뿐이다. 얼마나 편해. 사지 늘어 뜨리고 팔자 좋게 '신경성이야', 말하면 납득이 되는 상황이.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어 위 내시경을 받기로 했다. 신경성이라 눙치는 건 병원病原을 뭉개고 잠재울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짜 원인을 찾아야지. 그리고 고쳐야지. 신경성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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