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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Jun 17. 2016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 2015

영광스러운 듯 전혀 영광스럽지 않은

 


 이가 하나 빠졌다. 그처럼  쳇 베이커(에단 호크)의 예술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 재즈란 게 그렇다. 흑인들이 고단한 삶을 달래며 향유하던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삼는다. 당연히도 재즈는 삶의 애환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음악 장르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삶엔 이런 '애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향유하는 재즈 역시 '애환'이 결핍되어 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울해질 수 없냐"는 제인(카르멘 에조고)에게 쳇 베이커는 말한다. "난 우울해지는 게 싫은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쳇 베이커의 삶엔 한 점 그늘도 없다. 여자들이 들끓는다. 생활은 문란하기만 하다. 재즈의 대가인 흑인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재즈 연주에 대해 공연히 험담하는 게 아니다.


 쳇 베이커는 과거를 회상한다. 영광스러웠던 그때다. 흑인 재즈의 대가들과 언쟁이 붙는다. 흑인 재즈 대가들은 말한다. "너를 따르는 저 백인 여자들이 재즈를 하나라도 이해한다고 생각하나?" 영광스럽게 보이나 예술적으론 전혀 영광스럽지 않다. 재즈를 표방하나 그는 전혀 재즈란 장르를 향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건 나사 빠진 재즈요, 그는 사이비 트럼펫 연주가다. 그때의 '영광'이 영광스럽다고 믿는 건 재즈의 본질을 모르는 백인 남자 쳇 베이커 한 명이다.



 그러다 쳇 베이커는 진짜 재즈를 접한다. 밑바닥에 떨어져 재기를 도모하면서다. 제인을 안식처 삼아 새로운 삶을 준비한다. 제인의 아버지를 만난다. 쳇 베이커는 제인의 아버지와 말싸움을 벌인다. "만약, 너라면 너 같은 남자에게 딸을 줄 수 있겠나"는 제인의 아버지의 독설에 크게 낙담한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그대로 뛰쳐든다. 이때 처음으로 쳇 베이커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우울함, 즉 '블루'란 존재를 맞닥뜨린다. 우수에 사로잡힌다. 트럼펫으로써  쳇 베이커는 자신의 삶이 담은 그 '애환'을 노래한다.  쳇 베이커가 '재즈'란 음악을 구가하는 건 영화에선 이때가 처음이다. 기교는 떨어졌을지언정 소리만은 예전보다 훨씬 낫다. 소리에 깊이가 생겼다. 그 소리를 들은 흑인 재즈 대가들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꿈에도 그리던 버드랜드의 무대에 선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쳇 베이커를 덮친다. '블루'에 휘어감긴 나머지 쳇 베이커는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선 트럼펫을 연주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한다. 딕은 그런 쳇 베이커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던진다. 약물에 의존하고서 이제까지의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냐, 아니면 메타돈을 집음으로써 평범하게 살 것이냐의 선택이 그렇다. 고민 끝에 무대에 올라선 쳇 베이커의 모습은 이제까지 보이던 쳇 베이커의 모습과 다르다. 불안감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 불안감 위를 거니는 듯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약을 했음을 직감한 제인은 결국 그를 등지고 현장을 빠져나간다. 비극이 재현되는 셈이다.



 쳇 베이커의 입장에서 보자. 단순한 약물 중독이냐, 메타돈이냐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재즈 예술가가 될 것인지, 그럭저럭 평범한 트럼펫 연주가로 남을 것인지의 선택이다. 트럼펫 연주자로서 '블루'에 스며들기 위해선 '약물'이 필요하다. 제인이란 '사랑'은 영속적인 약물이 되지 못한다. 함께 뉴욕을 가자는 쳇 베이커의 제안을 제인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약물이 아니고선 쳇 베이커는 진짜 재즈를 향유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막판 공연 직후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사뭇 대조적이다.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라던 제인은 눈물을 흘리는 반면, 예술가의 삶을 지지하는 흑인 재즈인들은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그제서야 쳇 베이커란 트럼펫 연주자를 인정한다. 기립 박수를 친다. 쳇 베이커의 선택을 단순한 '약물 중독 운명'의 재현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보단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 한 명의 예술인이 태동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떠나간 제인을 등지고서 쳇 베이커가 "Born to be Blue"를 선곡할 때 그 목소리의 비장함은 남다르다.


 그렇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마치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느낌이다. '영광'이 탄생한 바로 그 자리에서 또다른 '영광'이 과거에 묻힌다. 쳇 베이커를 보고서 이별을 직감한 제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차마 외면하기 어렵다.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던 둘의 이야기가 눈 앞에 펼쳐진다. 자신들의 세계로의 발디딤을 축하하는 흑인 재즈 음악 대가들의 박수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거추장스럽게만 들린다. 예술의 탄생이란 게, 예술인의 탄생이란 게 이렇게 아이러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완성된 쳇 베이커의 음악은 반갑지만서도 약물로 인해 그의 삶이 파멸을 맞는 건 전혀 반갑지 않다. 과거에 파묻힌 일레인 하며 제인의 삶은 더욱 안타깝게만 여겨진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Born to be Blue'의 멜로디는 어딘가 모순된 감정 위를 표류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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