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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필적 글쓰기 Aug 06. 2016

대접도 못 받을 제주 이야기

질 렸 잖 아

 

용암이 찢어놓은 바윗결


장남은 외로워





 모두가 밀어보내고 모두에게 밀려오는 제주 이야기. 공급 과잉은 수요 하는 입장을 피곤하게 하는지라 나라도 다물고 있어야지 했다.

 #을 앞머리에 붙이면 제주의 모든 맛집과 관광지를 눈대중할 수 있는 첨단한 네트워크 덕분에, 화두조차 되지 못하는 제주 여행기이지만 뻔해도 '내 이야기'일 땐 맛이 좀 별난 법이다.

 나는 제주 어느 갈치조림 집의 갈치가 살이 푸짐해 갈비 같았다거나 어느 국숫집 국수의 탄성 훌륭하기가 후루룩 한 박자에 볼 치고 턱 치고 이마까지 친 다음에야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던가 하는 방정을 떨진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제주 이야기와 궁합 좋은 제주 사진이라도 폼나게 찍는다면 모른다. 사진은 겨우 휴대폰 뒤통수에 달린 미니 공방 소품 같은 카메라로 찍어서 화질 담보도 못 든다.

 바다 이야기를 쓸 거다. 사실 제주도가 아니어도 바다여서 성립되는 이야기다. 제주 이야기보단 바다 이야기로 보는 게 낫겠다. 아케이드 게임 바다이야기는 아니다.



  내게 바다는 실체가 아닌 영상이었다. 바다는 만지기보다 티브이로 만나는 대상이었다. 나는 육지의 인간이라 바다와 사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분지에서 나고 자랐고, 커서는 분지를 벗어났지만 그래 봤자 바다 먼 서울이었다. 바다 멋쟁이 고래와 육지 예쁜이 코끼리의 애정 결합은 동요의 동심이 아니라 신화의 신앙심에 견줘진다. 비늘과 아가미를 갖지 못한 내가 얕은 숨이라도 할딱이려면 육지가 편했다. 바다는 멸치와 고등어로만 알았다. 그것이 내가 가진 바다의 물리이다.



 제주도를 오는 동안 제주 육지를 바라고 왔다. 구멍 난 돌멩이와 흑돼지 맛이 궁금했다. 흑돼지 근고기가 둥글게 도열한 중심에서 끓는 멜젓의 젓내가 궁금했다. 차 렌트가 안 되는 주제라 해안도로를 달릴 계획도 없었다. 나는 교무실이 있는 2층을 서성대다가 학생부장 선생을 만났다고 징징대는 모양으로, 제주에 갔다가 '실수로' 바다를 만나 절절맸다. 싫진 않았지만 무서웠다.




 내 앎이 짧은 관계로 바다는 멸치와 고등어 이외의 친구들과 산발적으로 사귀고 있었다. 원해의 파도에 떠밀려 연안에서 죽은 붉은 해파리도 살아생전엔 바다의 숨이었겠다. 연안에서 둥실 거리는 해파리는 만물을 긴장케 했던 다발의 촉수를 팽개친 채 미역에 감겨 죽어있었다. 얕은 근해에서 풀포기만큼 자란 미역은 해파리가 죽고 나서야 제 본떼를 보여준다. 나는 요오드가 많아 젖을 돌게 한다는 둥 하며.



 해파리나 물고기 일체가 떠밀려 죽고 감겨 죽고 오염돼 죽는 바다를 사람들은 몸에 묻힌다. 미역은 본래 물에 살고 사람은 본래 물에 젖는다. 물에 젖지 않는 것과 물에 젖는 것이 물에 함께 잠겨 논다. 내 발도 담갔다. 엄청 무서웠다. 집 장판과 맨발 사이엔 필요할 만큼의 마찰이 있었는데, 물이끼 슨 바다 돌멩이와 맨발 사이엔 불필요한 미끌 거림만 있었다.  발목까지 겨우 담갔더니 파도는 농담하듯 종아리까지 덮친다. 나는 바다에 물린 듯이 놀랐다. 거봐. 바다는 이렇다니까. 발을 말리며 나는 발에서 신발의 구린내 대신 바다의 비린내를 걱정했다. 바다는 쉽게 체취를 이양하지 않는다. 높은 콧대가 솟은 오름과 같다.



 바다는 어렵다. 젖기 싫어 무섭고 젖고 싶어 무섭다. 얕다고 만만하게 다루면 그 오만을 비웃듯 바로 깊어진다. 바닷물 찾아 깊이깊이 전진하는 아이에게 "그만 들어가!"라며 다그치는 부모의 목소리는 기러기의 끼룩 보다 더 진하다. 육지의 굳기는 나에게 안정을 주지만 바다의 무름은 내게 불리하기만 하다. 나는 언제 흩어질지 모르는 모래사장과 해저 바닥을 철저히 의심한다. 시멘트 바닥만이 내 신뢰의 본거지다. 나는 바다와 연관한 것들 중에서 멸치와 고등어만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것들은 내 냄비에서 졸거나 달여지지 않는다. 내 손과 내 연장에 놀아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넘겨짚을 한 톨의 힌트에도 인색하다. 바다는 멸치랑 고등어다. 내게 그 이상의 바다란 무려 철학이다.  



 여전히 바다는 있지만 없는 것이다. 내 뒤통수에서 찰랑거려도 내 전방에서 알랑거리지 않으니 나는 여전히 바다가 멀다. 나는 바다의 근해를 보며 심해의 우수를 떠올린다. 심해에 대한 공포증을 근해까지 끄집어와 괜한 겁을 얻는다. 바다의 물리는 내 육체를 어떻게 때릴까. 나는 바다와 사귈 요령을 얻을 수 있을까. 한 달은 짧다. 그리고 왜인지 바다는 언제까지고 어려울 것 같다. 바닷속에서 내 몸은 뜨지 못하고 영원히 가라앉을 것 같다. 이건 염도의 문제도 칼로리의 문제도 아니다.




 제주 바다는 '휠링'이 아니다. 나도 월정리나 협재에서 쿨하고 힙하게 ㅋ 놀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나 바다에 빠진 적 있나? 엄마는 칼칼하게 웃는다. 맞나 보다. 왜 기억엔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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