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필적 글쓰기 Aug 26. 2016

위안부 합의의 불합不合

감히




내가 만년 사용했던 단어들은 그 쓰임이 모두 빗나가고 엇나갔나보다. 나는 이토록 모국어의 용처에 저능했나. 기강 다림질의 본체인 공직이 하도 떵떵 우겨대니 나란 소시민은 헷갈렸다. 


'사죄와 위로가 엇비슷이나 한거였어..?'


혹한의 12월,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귓전에 접근한 건 냉골이었지 사죄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한일 정부가 속결한 위안부 합의는 '주체'가 누락된 채로도 공公의 위신을 얻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동절기의 추위보다 국가의 허튼 결정을 더 추워했다. 합의 철회가 여론이 되었다. 국가 간의 공식적 합의니 번복이 어렵다는 게 이를 주관한 관료의 변이었다. 더구나 이번 합의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끝내기 강수가 덧붙여졌다. 


혹한이 훈풍에 녹더니 혹서가 왔다. 계절 두개가 죽고 하나가 절정을 맞았지만 부당한 위안부 합의엔 잔금도 서리지 않았다. 오늘 기사를 보니,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출연하기로 한 '위로금' 10억엔(한화 111억원)을 현금으로 분납해 피해자 분들에게 지급하겠다고 밝혔단다. 할머니들은 폭서의 맹위보다 국가의 기만적 '애민' 행태에 더 기가 찰 것이다. 정부의 애민愛民??? ㄴㄴ해민害民적 행위에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는 사죄와 인정의 법적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은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나는 확신한다. 내가 사용했던 단어들의 쓰임이 감히 옳았다는 것을. 나는 적어도 사죄와 위로의 판이한 정체성을 글로도 마음으로도 동시에 안다. 사죄와 위로는 엇비슷도 못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사죄와 인정을 원한다.

사죄는 죄송합니다. 인정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결국, "죄송합니다. 모두 우리의 잘못입니다." 위안부 피해자 분들은 이 한 문장이 듣고 싶은 것이다. 아니, 이 한 문장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죄엔 죄의 시인과 동시에 용서를 빈다는 의미가 있다. 용서를 빈다는 것은 내 죄를 내가 안다는 인정이다. 그래서 사죄는 가해의 주체를 명시한다. 사죄의 발화자가 곧 가해의 주체다. 제 무릎을 제 스스로 꿇리는 일이다. 당신의 상처 아래 나를 낮추겠단 의지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

위로는 고작해야 "유감입니다"이다. 위로는 죄를 시인하지 않고 죄를 전가시킨다. 전가의 대상은 특정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방점은 죄과를 불특정 외부에 떠넘긴다는 점이다. 책임이 회피된다. 가해 주체가 흐리터분해진다. 위로를 한 사람이 가해자일수도, 제 3자일 수도 있다. 주체가 분산되어 가해자란 낙인에서 빠져나갈 길이 열린다. 발화자가 범인임이 특정되지 않으니 스스로를 주저 앉힐 필요가 없다. 상대의 상처 아래 조아릴 필요도 없다. 


더구나 위로는 가해를 지우고 피해만 부각시킨다. 무엇 무엇을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무엇 무엇을 당하셨군요,가 위로의 주요 대사다. 피해 할머니들은 용서와 배상 대신 동정만 받게 되었다. 사죄를 받아야 할 분들이 고작 '불쌍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사죄한 일본은 위안부 가해국가가 되고, 위로한 일본은 인도적인 국가가 된다. 일본은 어김없이 위로를 택했다. 사죄를 택해야 할 우리 정부도 위로로 만족했다. 치사한 판단이자 화폐적인 결정이다.



피해 당사자가 거부하는 위로를 공권이 나서서 중계하려는 건 월권행위다. 네가 날 때렸는데 우리 담임이 다음 학기나 돼서 네 위로를 받으라 내게 훈계하는 꼴이다. 그래, 천 번 고쳐 생각해 담임이면 학생에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우리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를 담임한 적이 있었나.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려 분투한 찰나라도 있었나. 내가 모르는 새가 있기나 했으면 좋겠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여든과 아흔의 고단한 분계에서 위로마저 강요받고 있었다. 이리 저리 튕기는 일본과 방관하는 우리 정부 사이에서 사죄를 쫓는 피해자 분들의 발은 길을 몰라 허망하다. 이기게 해주진 못할 망정 마냥 패배하게 만들진 말아야지. 2011년 인정된 개인 청구권은 정부의 몰수 품목이 되었고, 할머니들은 값싼 위로와 위로금을 분납으로 받게 생겼다. 정말 이따위로 맺어져도 괜찮은걸까. 위안과 위로 사이의 세월은 한탄으로 자욱하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조금도 곁쬘 수 없어서 마냥 화만 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접도 못 받을 제주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