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온 종달새 편지(2.24.월. 벽을 넘어서)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의 삶은
무엇인가를 기어올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벽이든
나무든
바위든
저의 이런 습성으로
타고 오르는 나무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
염려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양분을 뿌리에서, 빨판에서 스스로 해결하지요.
타고 오르는 나무와도 잘 지냅니다.
비바람의 덮게 역할도 해주고
태양의 열기로 부터 보호도 해주지요.
나무는 제게 의지의 대상일 뿐이지만
포용적인 나무와는 많은 대화를 합니다.
사실
나무는
외로운 시인이며 철학자로
달, 별 밝은 밤이면
늘 잠못이루고 고뇌에 찬 시간을 보내지요.
저는
나무와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체온과 숨소리를 듣고 함께 자라니까
나무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합니다.
의연한 모습으로
늘
그렇게
서 있는
모든 나무들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사실
담장을 오르는 것은
저의 특기입니다.
그래서
제 이름이
담쟁이덩굴이겠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황량한 담벼락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도 안되고
수직의 담장은 힘에 버겁기도 했지요.
그러나
도시의 황량함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습니다.
회색빛 담벼락
따가운 햇살에 몸이 타들어 갔지만
누군가를 위한 노고라 생각하며 힘을 내었지요.
한여름
푸르른 윤기돋은 넓은 잎으로
담벼락을 휘감으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멋스런 풍광에 감탄을 자아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리고
열정의 시간이 지난후
가을이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한살이를 마감할 때
시인과 철학자들에게
축복해 주고 싶었지요.
회색빛 도시에 사는 또 다른 시인과 철학자들에게도
그래서
피를 토해내듯
붉은 빛으로 치장하였습니다.
눈물겨운 핏빛으로
'고뇌하는 여러분들 모두를 사랑하네요.'
찬바람이 불던 어느 초겨울
나의 마지막 잎새는
누군가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기고
바람따라 가벼렸습니다.
저는
사랑의 마지막 잎새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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