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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구닷 May 07. 2016

#5.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야"

5-1. 외주화로 자생력 잃어가는 대기업 직원들

가 처음 14년 자동차 부품회사에 입사한 후 퇴사를 할 때는 머릿속에 온통 이런 생각들 뿐이었다.

- 아니 도대체 이 일을 왜 하는 거야? 
- 적성에 안 맞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 이 일 열심히 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거야?

나가면 당장 돈 끊기고, 기업이라는 보호 울타리 안을 벗어난 외톨이가 되는 듯한 걱정도 컸지만

현실적인 요소들보다는 이를 압도할 만큼 직업에 대한 본질적인 걱정이 큰 것이었다. 

그래도 선택할 수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이직하여 현재 H자동차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그러한 의구심을 사라졌을까?

오히려 더 커졌다. 질문이 더 본질적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렇게 크고 대단한 기업인데 왜 중요한 업무들은 다 외주화가 되어있지?"

이미 대기업의 정직원들은 스스로 무언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정관리나 PM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중요한 업무들과 기술은 외주화가 되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누군가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 

내가 아는 한국의 대표 자동차 회사에는 수많은 연구원들이 있지만 핵심 설계 능력은 

대부분 협력사가 보유하고 있고 연구소라는 곳은 제품을 설계하지 않고 가이드만을 제공한다.

그러면 연구원들은 설계도 안 그리고 무얼 하냐고?

가져온 설계도면에 문제는 없는지 관리하고 승인한다. 

자동차를 홍보하려면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 멋진 CF 광고와 영상제작은 누가 할까. 

현대카드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와 같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피라이팅은 누가 할까. 

실제로 영상을 제작하고 카피라이팅을 하는 곳은 마케팅 전문 외주업체다.

그럼 마케팅팀은 무얼 하냐고? 

이런 광고를 원한다는 가이드를 주고 업체를 찾고 계약하고 관리한다. 

자동차를 팔려면 누군가는 영업을 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당신이 차를 사기 위해 방문한 자동차 대리점은 말 그대로 대리점이다. 

그곳의 영업사원들은 자동차 회사 직원이 아니다.

그러면 대기업 영업팀은 무엇하고 있냐고?

이런 가격으로 이런 장점들을 부각시켜서 판매해주세요. 

목표치가 얼마이기 때문에 염두해주시고 최근의 본사 판매정책이 이러하니 따라주세요. 

영업직들을 관리한다. 



회사 인원 전체가 PM이 되어간다

최고의 인재들을 뽑아 높은 연봉을 주고 있는 대기업들이지만

정작 직원들은 스스로 콘텐츠 하나 온전히 만들어 낼 수 없도록 업무를 해나가고 있고

일정관리와 통제, 검토만을 하는 PM이 되었다. 

한마디로 자생력을 잃었다. 

설계를 할 수 없는 연구원

광고를 만들 수 없는 마케팀 담당

스스로 물건을 판매할 수 없는 영업관리직

 

그럼에도 대기업이 돈을 버는 건 운이 좋게도 이미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시스템이 지속될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일은 중소기업에서 다하고 관리는 대기업에서 하는데

연봉은 대기업 직원들이 더 많이 받는다. 

어찌 보면 다단계의 그것과도 닮았다

인간 피라미드의 높은 층일수록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 나의 능력쯤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PM은 시스템이 대체하게 될 것

PM의 역할은 너무나 쉽게도 시스템으로 대체될 수 있다. 

정해진 일정과 규격에 맞는지, 필요한 항목은 모두 입력되었는지, 

계약상의 문제는 없는지는 시스템만으로 도 가능하다.

이는 체크 목적의 요소이지 아이디어가 들어갈 요소가 적어서 굳이 사람이 필요치 않다.  

예로 세계 금융을 이끄는 월스트리트의 천재들도 시스템트레이딩에 의해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10명의 애널리스트가 꼬박 밤을 새야 했던 엑셀 작업과 분석작업은 컴퓨터가 클릭 한 번 만으로

대체할 수 있는 시대에서 과연 언제까지 PM을 주업으로 하는 직원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시대가 아직 먼 것처럼 느껴진다면 현실을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2008년 스마트폰 예언글 : 좌(게시글)/우(댓글) 

2008년 스마트폰 예언글이 온라인에 등장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배터리 기술의 한계라며 몇십 년 뒤에나 가능할 거라던 전기차 시대는 테슬라로 인해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인류 최강의 바둑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쥔 알파고의 등장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기술은 직선이 아닌 지수함수로 발전한다. 그러한 시기는 예상보다 빠르게 올 것이다.  

더 이상 회사에 직원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졌을 때, 자신만의 능력을 잃은

직장인들은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내 정치 능력은 예외로 하자)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이 안정적이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인생 테크트리 → 치킨집??

많은 직장인들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해 구체화하지 못했을 뿐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우스겟소리로 돌아다니는 인생 테크트리를 보면 종류를 불문하고 최종 목적지는 치킨집으로 귀결한다. 

그만큼이나 수많은 직장인들이 죽어라 일하면서도 스스로 돈 벌어먹을 능력 하나 손에 쥐고 있지 못하고

근근이 모아 온 돈으로 할 수 있는 창업은 치킨집뿐이라는 이야기다. 

절대로 치킨이나 치킨집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해를 위한 예시를 든 것이다.

(치킨은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을 것 같고 너무 좋다)


회사 밖은 지옥이다. 그런데 우린 언제가 그곳에 가게 되어있다.

안타깝게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인재들, 잘못된 무언가를 바꾸려는 도전가들,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비전가들, 현재 직장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벌어먹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능력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기업을 혁신시킬 부류들인데도 대기업에서 나가버리고 만다. 

정말로 자신의 업무에 사명감을 느끼는 소수 일부를 제외하고는

도전하지 못하는 자들, 안주하는 자들, 새로움이 두려운 자들, 타협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기업에 남게 되고 그들이 문화를 만들어간다. 

세대가 반복될수록 굳어지고 단단해져 완벽히 자생력을 잃고 고립되었을 때가 오면

노키아의 몰락을 겪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웹툰 미생에는 이런 명대사가 있다.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야"

이 대사는 대한민국 수많은 직장인들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남겼고 

알게 모르게 느끼던 두려움을 한 문장으로 구체화해줌으로써 많은 공감을 샀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나 역시 저 촌철살인 같은 한 문장에 깊이 동의하지만

지옥보다야 전쟁터가 낫다고 생각했다면 어쩌면 또 한번 타협하고 만 것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회사가 날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시대가 기술의 발전으로 예상보다 빨리 올 것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내가 지금은 전쟁터에 있지만 시기의 차이일 뿐, 회사 밖 지옥에 가게 될 것에 동의한다면

도대체 왜 "전쟁터가 그래도 낫지"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지옥에서라도 살아남을 나만의 무기나 콘텐츠, 자생력을 키워야 하는 게 아닐까


사회에 혼자 덩그러니 던져졌을 때, 

나는 어느 회사에 다녔었습니다 따위가 나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는 분명 사라질 것이다. 

나는 어떤 능력이 있고 어떤 일을 해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자소서가 아닌 이력서를 준비할 때
여기에 나는 무엇을 채우지... https://www.kickresume.com 참고

가족관계와 성장과정, 도전적인 경험, 행복했던 순간을 서술하는 무의미한 공간은 사라지고

업무 경험과 능력을 적는 공간만 남겨졌을 때 

머뭇거리고 당황하고 싶지 않지 않은가.

전자는 "자기소개서"이고 후자는 "이력서"이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자기소개서가 아닌 이력서를 써야 하는 때가 온다.  

실제로 외국계 회사의 레쥬메만 보아도 전자가 아닌 후자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커버레터와 같은 부분도 있지만...)










내가 딱 그렇다. 8시에 출근해서 8시까지는 일 하는데 (바쁠 때는 바쁘고 여유 있을 때는 또 여유 있지만)

딱히 노는 것도 아닌데 나름 열심히 했는데 돌아보고 나면 이력서에 머라고 쓸 것이 없다.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원래 그렇다고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생력을 잃은 직장인은 을사조약에 사인한 국가와 같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직장인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어느 한 양반가에 묶인 노비 일가가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그들을 좋게 본 노비들의 주인이 노비들을 자유롭게 해주기로 마음먹었고, 어느 날 노비들에게 그 마음을 말했다. 그러자 노비들이 하는 말은 "우릴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주인님" 이었다.


일본이  대한민국을 삼키려 한 을사조약이란 무엇인가.

조선이 맺는 모든 조약이나 협정을 일본이 대신 맺어줌으로써 당장 나라가 넘어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자생력을 잃은 국가가 어떤 위험에 처하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안다. 


자생력을 잃은 직장인들이 결국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인가. 

중요한 능력은 외주화가 되고 PM으로서의 업무만을 남겨놓은 대기업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인가는 너무나 자명하다. 


마치며

입사동기였고 아끼는 동생인 한 친구는 얼마 전 퇴사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젤라또를 공부하기 위해 젤라또 매장에서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다. 

주변에서 누군가는 잘 다니던 H자동차를 그만두고 연봉을 반토막 내면서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한다. 

과연?

10년 뒤에 혹은 20년 뒤에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 땅에 혼자 떨어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 친구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 수 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도 외로운 길이지만 틀리지 않았다고 힘을 주고 싶고

같은 처지에 속한 직장인들에게는 공감을 주고, 그래도 고민을 멈추지는 말자는 메시지를 담은

글을 쓰고 싶다. 


PS : 재미난 이야기 거리나 소재, 의견이 있으면

gzerof@gmail.com로 주세요. 온/오프라인 인터뷰도 하고 글이 되면 사례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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