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의 온도

by 간호사 박도순

정성의 온도


액시마정, 리나치올캡슐, 하루 두 번, 84일. 리리카캡슐, 다이아벡스엑스알서방정, 테넬리아정, 덱시드정, 아미트리프틸린정, 리피딜슈프라정, 하루 한 번 혹은 두 번, 21일. 플래리스정, 올메액트정, 위드캅셀, 하루 한 번, 84일. 하이네콜정, 자트랄엑스엘정, 아보두타연질캅셀, 하루 한 번 혹은 두 번, 84일. 정씨가 내민 약제비 계산서와 넉 장의 처방전이다. 트레시바플렉스터치 주사를 포함하여 열다섯 가지. 약 먹는 것도 순서가 있을 것인디, 무슨 약부터 먹어야 옳은지 가르쳐달라 하셨다. 몇 번을 읽고 읽어도 발음조차 어려운 이름들 사이로 아는 것이라곤 한 가지뿐. 정씨 처방전 앞에 나는 너무나 왜소했다. 아니,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아, 이런 난감함이라니.

약학정보원 홈페이지를 열었다. 모양과 색상, 문자와 마크, 분할선 등 식별 부호 입력 후 복약 정보를 검색했다. 한 번 생기면 치료 기간이 평균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그것. 정씨는 당뇨병성 족부 궤양 환자이다. 그가 보건진료소에 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한 달 전 그의 부인이 오셨다. 반창고와 붕대 몇 장 달라고 하셨다. 남편이 다리를 좀 다쳤다는 것이다. 일회용 포비돈 면봉까지 챙겨드렸다. 며칠 후 다시 오셔서 같은 것을 요구했다. 얼마나 다쳐서 그러시나 여쭈니, 이제 거짐 다 나사 가고 있다고 하셨다. 의심 없이 드렸다. 그런데 또 오신 것이다. 환자를 직접 보기 전에는 줄 수 없노라고 이번에는 내가 거부했다. 같이 집으로 가자고 했다. 누추해서 안 된다고 손을 저으신다. 한참 후 남편과 같이 오셨다. 이것이 첫 만남이다.


진찰대에 앉은 어르신이 주춤주춤 바지를 걷어 올리신다. 발목과 발가락 사이에 나름대로 덧댄 거즈를 걷어냈다. 일그러진 궤양이 화장지 속에 숨어 있다. 슬라이스 치즈를 뜨거운 프라이팬에 올리면 막 녹아내리는 흐물거림이라고 할까. 불고 굳기를 반복한 그것의 중심은 호박엿처럼 노랗고, 가장자리에는 마른 진물이 가루 설탕처럼 묻어 있다. 이것이 조금 다쳐, 거짐 다 나사 가고 있는 상처란 말인가! “어머나! 어쩌다 이 지경, 병원에는 왜 가지 않았습니까?” 정씨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병원, 병원! 나는 병원을 되뇌며 드레싱카를 끌어당겼다. 소독 세트를 열어 환부를 정리하는 동안, 식염수로 세척하는 동안에도 정씨는 말이 없다. 거즈를 덮고 첫 드레싱을 마치기까지.


소염제 항생제를 처방하면서 날마다 오셔야 한다는 당부보다 병원으로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권면이 더 앞장섰다. 약을 받아든 정씨는 진료실에서 나가려다 선 채로 말씀하셨다. “여기는 병원 아닙니까?”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예후를 알 수 없는 환부 치료에 적잖은 부담을 느낀 나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다음날, 혈압 124/71mmHg, 식후 혈당 124mm/dL, 체온 36.2℃. 젖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추니 삼출물이 여전하다. 한 달 넘도록 병원에 다녀도 소용없어서 집사람한테 반창고나 얻어오라고 시킨 겁니다. 병원요? 안 갈랍니다. 묻지 않은 그간의 치료 경험이 장황하게 펼쳐졌다. 그날 오후 평소 알고 지내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환부 사진을 전송했다. 74세, 남자, 당뇨력 30년 넘음, 대학병원 내과 인슐린 셀프 인젝 중. 진료소 처방 진통소염항생제 이부프로펜, 아목사실린. 무엇을 어떻게 더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의뢰하세요. 당뇨발 환자라면 더 더더욱! / 가족이 알아서 하게 하세요. / 보건진료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병원에 가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 사진 보니 큰 병원으로 가도 심각할 것 같군요. / 도와주지 마세요. 그래야 병원으로 가십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도움입니다. 카톡카톡카톡.



예상대로였다. 결론은 병원으로 보내라는 것이었고, 갈수록 심각해져 발목을 절단할 수 있다는 조언도 빠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제공되는 것은 보건진료소에서 제공되는 것과 무엇이 교집합이고 차집합일까. 보건진료소 시설, 인적, 물적 시스템과 같은 것은 무엇이고 다른 것은 무엇일까. 뻔한 질문 뻔한 답이 새삼스럽다. 바이탈사인, 8시간 이상 금식 혈당 126ml/dL, 환자 증상과 임의 혈장 포도당 농도 200ml/dL, 75g 경부 당부하 PP2 200ml/dL, 당화혈색소 6.5% 이상. 65세 이상 노인 유병률 30%. 당뇨 지표와 혈당 조절 장애 기준의 정보를 더 수집했다. 관리와 치료까지 논할 능력은 없다.


자꾸 병원으로 가라 하면 진료소에도 오지 않겠다는 당신의 선언은 사각지대로 숨어버리겠다는 선포이다. 아침마다 인사 나누며 안색을 살피고, 혈압 혈당 확인하는 것이 상태 확인의 최선이지 전부이다. 세 번의 드레싱을 마쳤다. 노인요양병원 닥터 김에게 사연을 전송했다. 나의 불안한 마음을 잡아준 조언이랄까. “드레싱에서 가장 중요한 첫째는 정성입니다. 둘째는 정성이요, 셋째도 정성입니다. 인내하시고 힘내세요. 소장님!”


고강도 무균술이나 고용량 처방이 아닌 ‘정성’이라는 단어가 빛처럼 눈 부셨다. 치료 때마다 들었다는 ‘다리 절단’ 워딩이 기분 안 좋아 병원에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는 어르신. 보건진료소의 빈약한 장비에 나의 용기마저 나약해진다. 알 수없는 절망감에 울고만 싶다. 그러나 식사 잘하는 편이고 혈압 혈당이 대체로 안정적이어서 위안이다. 나는 말했다. 우리 서로에게 정성을 다해보자고, 세 번만, 또 세 번만 다시 해보자고! 그러다 보면 지성여신(至誠如神)의 능력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고! 그래도 안 되면 그건 그때 가서 판단하자고! 마주 보며 웃는 이유이다.


투약 관리 이행에 대한 확신의 부재, 병원에 다녀도 별 호전 없는 상처와 때로 치솟은 혈당, 어쩌다 발을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더라는 푸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체념 너머로 시간 고문이 가혹하다. 끊어진 당신의 발목은 어쩌자고 내 꿈길까지 따라와 나를 괴롭게 하시는가. 석 달도 안 된 나의 간호 중재는 미약하다. 간호 과정에 부족한 것이 어찌 정성뿐이랴마는, 내 마음 온도 식어질 때 10℃씩 데워줄 처방 있다면 좋겠다. 하루 세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셀프 인젝 가능하면 더 좋겠고, 처방 일수는 무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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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목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