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일기
AC 4차와 파클리 항암 10차를 합친 14차 항암 일입니다. 이제 두 번 남았습니다. 남은 치료 일정 잘 마치기를, 부작용 없이 예정대로 수술 잘 진행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히려 잘 해내리라 다짐했던 결심이 머리카락 스러지듯 힘이 빠집니다. 선생님과 신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상태입니다. 잘 먹자! 운동하자! 기도하자! 평안 잃지 말자! 오늘도 주문처럼 외웁니다. 가족들이 부어주는 사랑과 응원이 감사할 따름이죠. 며칠 후…. 마지막 항암 받으러 왔습니다. 채혈간호사에게 오늘이 최종이라 하였더니, 어머나! 힘든 과정인데 그동안 고생 많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고 하십니다. 울컥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카톡).
그녀는 오십 대 초반 유방암 환자이다. 기침이 오래되어 폐에 이상이 있나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왼쪽 가슴에 이상한 것이 보이는데요? 혼잣말 같은 의사의 그 말이 첫 대면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암 진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치료 과정과 흔들리는 감정, 병원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메신저로 전해준다. 고난이 죄를 그친다, 저는 뼛속 깊이 죄인입니다, 라는 자책에서부터 아픈 것이 죄는 아니야, 쉬어가도 괜찮아! 무너진 일상에 던지는 셀프 위안 셀프 샷도 보내왔다. 머리카락이 2cm 정도 자랐어요, 삼손이 데릴라 때문에 삭발했을 때 얼마나 애통했을까요, 다시 자라날 때는 또 얼마나 희망적이었을까요. 오늘은 삼손 생각이 납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깨닫습니다.
감사하며 기쁘게 살자는 말은 너무나 낡아져 헐거워진 옷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잠언과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나눠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녀의 글을 읽어주는 것, 그리고 나서는 희망적(!) 이모티콘을 날려주는 것이 전부이다. 암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그녀가 겪고 있는 스트레스 무게감과 불안, 어쩌지 못하고 자책에 빠지고야 마는 피곤한 불쾌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가끔 절망감으로 대성통곡하는 슬픔도 이해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쯤은 사소한 변화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평소와 다른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마음의 요동들, 어찌 알 수 있으리.
보건진료소 업무 중 암 환자 관리 사업은 사업이라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런데도 지역 현황에 빠지지 않는 등록 암 환자 수는 스무 명에 가깝다. 그분들은 각기 다른 진단, 진행 정도, 선택하고 의존하는 대체 의학들도 다르다. 병원에서 권한 항암이나 수술을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온 분도 계신다. 가까이 있는 덕유산 맑은 물을 두고도 지리산 어느 암반수를 받아다 마시고 있다거나, 무주 마늘을 두고도 함양 마늘을 사다가 흑마늘로 구워 먹는다는 분, 죽염 예찬론자, 버섯과 약초를 구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분, 황토방에서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극진하고 진지한 대체 의료 앞에서 나는 매번 놀랍기만 하다. 도움될 만한 조언을 제시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간호사임을 자처하는 나를 참 겸연쩍게 만든다.
암 진단 후 그녀 가족의 모든 삶이 변했다. 하던 사업을 접은 것은 물론이다. 남편과 아이들도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자다 일어난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엄마! 엄마는 믿음이 주먹보다도 작아요!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갔을 때도 기도했대요. 엄마가 지금 사자 굴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요? 쾅! 암이라는 그림자에 휘감겨 스스로 나락에 떨어지던 날, 예상치 못한 어린 아들의 뜨끔한 설교는 자신을 큰 진동으로 흔들었다고 했다.
잘 계시지요? 오늘은 스타벅스에 왔습니다. 제주 유기농 말차로 만든 녹차라떼로 아침 분위기 내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쉬고 있습니다(카톡). 그녀의 일상에 나의 일상도 나누기 시작하였다. 보건진료소 마당에 상사화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른 명이 넘은 환자가 다녀가셨습니다. 주문한 물건이 택배로 왔는데요, 마음에 안 들어요, 낚인 것 같아요. 아침에는 콩나물국을 끓였답니다 등.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조각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일상에 눈부셔했고, 그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른다는 답글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침 컨셉은 옛날 도시락입니다. 어머나! 훌륭한 밥상이군요. 더욱 신경 써서 챙겨 먹게 되네요. 준비한 밥상에 어린 정성이 느껴집니다. 네이버 유방암 환우 모임 카페에 올렸습니다. 밥 동무가 옆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 밥상에서 힘을 얻을 것 같습니다. 요즘 불면증으로 밤을 꼬박 새웁니다. 어젯밤에는 30분 정도밖에 못 잤습니다. 잠이 안 와서 일을 하였더니 정신이 몽롱하고 피곤합니다. 저런! 정말 피곤하시겠군요.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은 정말로 낫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중한 이 순간들을 낭비하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시게요, 글을 적어놓고 차마 엔터를 두드리지 못한다. 그녀와 대화가 이어지면 어쭙잖게 평가하려는 내가 보인다. 그녀는 지금 충격적 부정(Shock and Denial) 단계인가, 분노 단계인가, 아니면, 타협일까, 우울일까, 아직 받아들임의 단계는 아닌 것 같아. 엘리자베스 쿠버로스 모델(Kübler-Ross model)을 떠올리는, 밥 동무는커녕, 나는 참 얼마나 한심하고 잔인한 간호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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