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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r 07. 2024

이야기 들어주기

간호일기

이야기 들어주기


소장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점심시간인데, 아, 고맙습니다. 잘 지내고 있죠. 하...... (한숨) 책상에 앉으면요, 괘종시계가 마음을 댕댕 때리는 것 같고요, 펼쳐놓은 일이 너덜거리다가 낡아져 버리는 기분이 들어요. 일이 손에 안 잡혀요(한숨). 육 남매 중에 장남이잖아요. 어머니 기억을 하나하나 정리 중인데, 쉽지 않네요. 혹시 마법 같은 조미료가 있을까(웃음). 소장님께 상담받으면 뭔가 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전화드렸습니다.


  …… 그날 저녁, 식사 중에 전화가 왔어요. 폐렴이라고요. 어머니를 상급병원으로 이송하라는 것이었죠. 급히 전원 조치하고 다음 날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병원이 영원처럼 멀게 느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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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어머니 임종이요,

첫눈처럼 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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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든다섯 살,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지 한 달이 지났네요. 어릴 적 우리 엄마에 대한 기억은 늘 아픈 사람, 아픈 엄마였어요. 친구들이랑 놀다 집에 들어와서 엄마가 안 보이면, 그런 날은 병원에 가신 거죠. 집이 텅 비기 일쑤였는데 그런 날은 내 마음도 텅텅 비어서 휑한 기분이 들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 허리는 활처럼 휘어졌어요. 점점 예각이 되어가셨죠. 모처럼 집에 갔을 때,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저는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 쫌! 의사가 지팡이 짚으라잖아요오오! 쪽팔려도 좀 지팡이 짚으라고요!


…… 입관할 때 보니까요, 어머니 허리가 수평처럼 꼿꼿하게 펴졌더라고요. 평온한 얼굴. 우리 어머니가 진짜 고통 없는 곳으로 가셨구나. 저렇게 반듯하게 누우셨는데도 아프다 소리 안 하시네. 어머니 썰렁한 이마에 대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편안한 곳으로 이끄셨군요. 감사합니다.


  장례를 치렀죠. 어머니 삶을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날마다 늘 익숙한 장소에 있는데, 왜 이리 낯선 느낌으로 가득할까요. 시계는 돌아가는데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고요,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질문을 하면 다시 말해 보라면서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어요. 늘 뭔가가 얹혀서 체기가 있는 것 같고, 음식을 먹으면 메슥거리고. 바위산에 홀로 앉아 저녁 눈보라를 마주하는 벌거벗은 나목 같달까.


    농협에 어머니 이름으로 몇천만 원이 있더라고요. 미국에 여동생 하나, 한국에 여동생 둘. 미국 동생은 너무 멀어 올 수도 없지마는, 한국 동생들이 사흘 걸러 한 번씩 집에 오더라고요. 아, 저것들이 돈 냄새를 맡았구나, 단박에 알았죠. 이런 일들은요, 드라마에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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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제 어깨 위로 장남이라는 묵직함이 새삼 느껴지더라고요. 동생들과 하나둘 부딪히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하자 그러면, 저렇게 하자 하고, 저렇게 하자 그러면, 이렇게 하자 하고, 사사건건 의견이 분분이 조각났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기로 했다 하니, 누구 맘대로 화장? 추모 공원에 모시기로 했다 하니, 누구 맘대로 추모 공원? 덤비듯이 따지는데 정말 환장하겠더라고요. 그래, 그럼 니들이 알아서 해라. 니가 장남 해라. 장자권 접을란다. 내가 한발 물러나마. 다섯째에게 장자권을 넘기겠다 했지요.


…… 동생들이랑 열다섯 살, 열일곱 살 나이 차가 있다 보니까, 나는 아버지 어머니랑 팔밭 일구고 돌 골라내면서 밭 만드는 현장에 있었는데, 갸들은 그 기억이 없는 겁니다. 동생들은 그 밭을 훗날 논으로 만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아, 한집에 살았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본가에 올 때, 작은아버지 댁, 고모님 댁 드릴 수박 세 덩이를 사와도 동생들은 한 덩이만 사와요. 그게 장남과 차남 차이일까요. 어머니의 외삼촌 외숙모 장례식까지 쫒아다녔는데 느그들은 안 그랬지. 제수씨랑 여동생들 있는 데서 조곤조곤 이야기했네요. 애경사 챙기는 일이 제 몫이었으니까요. 어머니 보내드리는 일에 아무 후회 없어요. 아우들이 집에 오든 안 오든, 다들 형편이 다르니까 그러려니 이해하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겪으시고, 스물세 살에 시집오신 어머니. 무밥, 꽁보리밥, 수수밥. 고단한 농부의 아내. 산을 밭으로 일구어 뽕나무 심고 누에치기, 담배 농사하기. 다랑논 넓혀나가기. 어머니 삶이 지독한 고생이었죠. 그 시대 사신 분들 정말 대단한 겁니다.


…… 아버지가 엄마를 등에 업고 병원 가시는 모습 여러 차례 보았어요. 엄마는 왜 그리 아픈 데가 많냐고 타박했던 철부지 제 모습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늘은 저렇게 파랗고 맑은데 저의 눈앞은 뿌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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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급실 드나들며 장남이라서 감당해야 했던 것들, 동생들에게도 문제가 생기면 나는 형이라고 나서서 해결해야 했던 일들이 참 많았는데, 요새는 회한에 젖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모시고 예수병원에 갔어요. 휠체어 대여소에 갔더니 남은 게 없다고 해서 아버지를 업었습니다. 전에는 의기양양하게 업었죠, 계단 올라서는데 허리가 삐끗하더라고요. 어이쿠야, 나도 나이 들어가는구나. 아버지 모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장남 노릇은 책임감으로만 무장한 영혼 없는 의무감이었을까요.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무엇은 없던 것이었을까요. 허한 마음이 가슴을 때립니다요. 삶이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책을 읽어도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친구 녀석들 농담도 싱겁기만 하고, 술 한 잔 마시게 나와라 해도 나가기도 싫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기분입니다.


 ……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눈물 흘린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우리 어머니 친구분들 조문 받을 때, 어르신들이 상주인 저에게 절을 하시는데요,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더만요. 그리고 또 언제였냐면, 사망신고 하러 갔는데, 어머니 이름 석 자. 김. 금. 순. 쓰고 나니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애달프다는 마음이 이런 것인가? 내가 해야지, 내가 할 일이지, 어머니 가시고 한 달 만에 신고서에 이름 적는데, 쿵하면서 내려앉던 마음. 아, 어머니 보내드린 것은 꽃상여가 아니더라고요, 화장(火葬)도 아니고요. 사망신고서가 내 손을 떠났을 때, 진정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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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리는 것도 정(情)이고, 맞는 것도 정이고, 미운 사랑, 고운 사랑, 눈부신 시간, 허름한 시간, 모두가 빛나는 순간들이었구나,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동생들이랑 이야기하니 세대 차이도 나고, 대화도 잘 안되고요, 뭔가 답답해서 전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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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속으로 시원한 바람 한 웅큼 들어올 수 있도록, 조언 부탁드립니다, 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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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분 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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