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세이
영하 6℃, 체감온도 -12℃. 앉아서 천리만리를 굽어보신다는 과학이 전하는 예측을 보며 마당을 거닐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땅의 침묵이 기일~다. 바람은 어제보다 맵차다. 방에 들어와 그대로 일기장에 적는다. 앞뒤로 뒤적이다 재작년 오늘에 적은 글을 읽었다. 의정부에 사는 친구가 장미, 살구나무, 모과나무를 보냈구나. 물에 담갔다가 다음날 심었다고 쓰여 있다. 흰 톱풀 꽃씨도 봉투에 담아 보냈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입으로 호오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얇고 가벼운 꽃씨. 거무튀튀한 씨앗만 봐서는 피어날 꽃색, 모양, 향기조차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꽃씨를 바라보며 아이고야, 이 어린 것, 어느 세월에 싹이 나고 줄기가 자랄까. 언제쯤 너희들이 지닌 호화로운 절정을 본다니.
4∼5년간 방치되었던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잡목들은 지붕과 키재기 중이었다. 불필요한 나무를 베어내고 풀을 뽑아내는데 나중에는 손가락이 아파 왔다. 꽃자리 잡느라 웃자란 잔디를 뽑아내고 흙을 털었다. 마음은 벌써 4∼5년을 앞서 달음질했다. 빨강 노랑 초록이 어우러진 정원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완성 중이었다. 처음 만난 저 작은 꽃씨가 얼마나 같잖았겠는가. 씨앗이 품고 있는 우주적 기운을 알 턱이 없었다. 꽃의 영광은 씨앗 하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세월에’를 읊조리며 가소롭게 여긴 것이다. 늘 의심했다. 신(神)의 섭리에 나는 귀가 열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건진료소 옆집 이순남 할머니가 붓꽃 서너 촉을 떼어주셨다. 그걸 들고나오면서 어르신 댁에 남은 우람한 포기를 바라보았다. 내 손에 들린 이 아이들은 ‘어느 세월에’ 샛노란 영광을 보여준다니.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심는 행위에 서린 몸짓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어여쁜 꽃짓만 급히 당겨보고 싶은 안달에 나는 느긋함의 미학을 누리지 못하는 오만한 가드너였다.
잡초 걷어내고, 크고 작은 돌멩이 골라내기를 두어 달. 거름 섞은 모래 채우니 꽃밭은 차츰 흙살이 차올랐다. 충분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나는 되는대로 마구마구 꽃씨를 뿌렸다. 봉숭아, 채송화, 나팔꽃, 에키네시아, 백일홍, 코스모스. 모수골 골짜기 산책 중에는 주인이 흘리고 간 작약을 발견하고 두 포기를 심기도 했다.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마당으로 나갔다. 밥을 짓는 것도 식구들 깨우는 것도 뒤로 하고 쪼그려 앉아 꼬물꼬물 올라오는 그것들을 바라보는 재미란. 시간 도둑맞기 딱 맞았다. 겨우 떡잎 두 장으로 기지개 켜는 새싹들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다.
밟아 버리면 그만인 저 여린 것들, 한낱 몇 알에 불과한 씨앗이 내미는 움싹들이 간지럼으로 나를 애무했다. 턱 괴고 앉아 보노라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자연의 신비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흰색 야로우의 성장세와 자연스러운 어울림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것이었다. 무얼 더 주랴, 빨리 자라렴, 어서 꽃을 보여다오. 2월이 가고 3월이 오고. 뿌리를 밟아주고 흙 덮어 북을 주고 돌아서면 꽃들은 붉은 오후의 포도주 빛깔로 피어나 내 가슴으로 화악~ 안겨 오는 것이다.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마음이 들떴다. 몸은 피곤해도 잠들 때마다 행복했다.
의정부에 사는 친구가 나무를 보냈다는 일기장 뒤에는 누군가는 추명국, 누군가는 금잔옥대, 누군가는 창포와 개미취를 보내주었다고 적혀있다. 앉은 자리에서 2년 전 기록까지 읽어 내려갔다. 집 주변을 맴돌던 들고양이가 드.디.어 우리를 경계하지 않는다. 우리 벌써 친해진 거니? 마늘잎이 돋아났다, 수선화 새잎이 올라온다! 등. 김종분 아주머니가 진료소 울타리에 선 채로 백일홍 꽃씨도 나눠주셨구나. 흩뿌리지 말고, 한곳에 모아 뿌리고 오종종히 자라면 하나씩 옮겨 심는 것이 좋다는 조언 아래에 밑줄이 그어 있다. 토종 으아리, 댄싱스마일·멀티블루 클레마티스. 꽃들은 저마다의 속성을 반영한 이름이 있었고, 이름만 들어도 이 아이들에게 숨은 폭발적인 힘을 얼추 유추하며 상상할 수 있었다. ‘3월 대설주의보 예상’이라는 메모는 빨강 색연필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계절은 살아 있다. 불과 3∼4년 전 일기장만 읽어봐도 이전과 변화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한다. 울퉁불퉁해지는 날씨도 불안하다. 말로만 듣던 이상기후 징후일까. 레이첼 카슨 작가님이 ‘침묵의 봄’을 통해 외친 60여 년 전의 경고가 이제야 우리 마당에 도착하는 것일까. 바람과 하늘과 달과 별. 나무는 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고, 새는 길을 헤매는 것일까. 가슴은 느린 봄 마중에 꽃멍이 들고, 울고 싶을 때 길을 잃은 우리는 사막을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정원은 적요해질 필요가 없다. 새들은 새소리를 내고,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야 한다. 어느 세월에 꽃으로 완성된다니! 얕잡아보며 조롱 섞던 초보 가드너의 푸념이 올해는 조금 줄어들었다. 봄은 기다림의 끝판왕.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즈음 슬쩍 다가온다.
감나무골 돌담길을 걷는다. 얼어붙은 강물 위를 날아오시느라 숨이 가쁜 모양이다. 청색증으로 입술이 파랗군요. 먼 길 달려온 제비꽃 무리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쉬고 계신다. 봄은 혼자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친구들이랑 같이 오느라 좀 늦었어요. 나를 생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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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가드닝 「정원에세이」 2025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