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졌을 때 고모는 열아홉 살, 고향은 이북. 이화고녀(이화여고)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6.25는 삶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고모는 언제 어디서 인민군이 자신을 잡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레 지나가는 소리에도 긴 불면의 밤을 보냈다. 당시 고모의 지인 중 혈혈단신으로 이북에서 내려와 이화여대 약대에 다니던 언니가 있었다. 학업과 생업에 치여 빨래 한 번을 제대로 못하던 언니였는데 고모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생리대 꿍쳐놓은 것까지 전부 꺼내 빨아주었다고 한다. 사방이 불안으로 가득 차 숨 쉬기가 어려워질 무렵 인민군 병원에서 일하던 언니는 고모에게 병원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차라리 호랑이굴로 들어오는 게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열아홉 살의 고모는 간호사로 위장해 인민군 병원에 들어갔다. 언니는 매일 밤 병원 골방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고모에게 주사 놓는 법, 상처 소독하는 법을 가르쳤다. 일주일이 지나자 고모는 혼자서 환자들을 보러 다녔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사를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를 비롯한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서울대병원으로 차출되었다. 총을 든 인민군들이 지키고 있던 병원 안의 풍경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의사들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얼굴들이 하얗게 질렸다. 하얗게 질린 그들 등 뒤에서 병원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혔다.
고모는 장교 병동에 배치를 받았고 인민군들은 간호사복 신발 속옷 양말을 배급했다. 외부에서 물품을 들여오던 이와 친분이 있는 장교 하나가 고모에게 탈출을 제의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고모는 환자들에게 처방된 세코날(수면제의 일종)을 조금씩 모아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을 시도한 장소가 무려 병원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의사 아니면 간호사라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는데. 고모는 삼일 만에 무사히 눈을 떴다.
인민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고 어느 날 밤 병원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청량리로 향하는 전차에 태웠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조명도 켜지 않은 화물열차는 고모를 싣고 밤새 달렸다. 도착한 곳은 속초였다. 인민군 책임자는 공습이 있을 수 있다며 데리고 온 이들을 민가 곳곳에 나누어 배치했다. 추석이 오기 전, 환자 울음소리에 미칠 것 같았던 고모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야밤에 집 주위를 서성거렸다. 어디선가 나지막한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쪽방 문을 열어보니 찬송가를 부르던 소녀 하나가 자지러지게 놀라며 고모를 쳐다봤다. 고모는 자신도 기독교인이라며 소녀를 진정시켰다. 열일곱 열아홉의 그녀들은 친구가 되었고 둘이라서 생긴 용기로 머지않아 탈출을 시도했다. 새까만 밤 강원도 산골에서 길을 잃은 십 대의 두 여자. 그 날의 절절한 공포는 평생 고모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절박한 마음으로 걷고 또 걷자 외딴집이 한 채 나왔고 만삭의 여인이 비를 맞아 덜덜 떠는 그녀들을 집으로 들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갔다. 이른 아침 잠귀가 밝은 고모는 대문에서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살며시 내다보니 군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총을 든 장정 열명 정도(1소대)가 주인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밤 그녀들이 널어놓은 간호사복을 보며 집에 누가 있는지 물었다. 곁에 누워 자던 동생이 깨는 것 같자 고모는 급하게 입을 막고 조용히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주인 여자의 신발을 꿰어 신고 뒷문으로 나갔다. 군인들은 고모를 불러내 어디로 가는지 같이 온 동생은 어디 갔는지 물었다. 고모는 동생이 화장실에 갔을 거라고 대답했는데 화장실을 확인하고 온 군인은 고모에게 총을 들이댔다.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군인들은 고모에게 자신들과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고모는 눈을 똑바로 뜨고 거절했다. '동생 옷이며 짐들이 다 여기 있고 나는 동생이 오기 전까지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열아홉의 간호사와 스무 살 남짓의 군인은 총을 사이에 놓고 한동안 눈싸움을 했다. 군인들은 결국 돌아갔고 힘이 풀린 고모는 마당에 주저앉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민가의 바깥주인은 숙명여대에 다니는 조카아이가 있는 황해도 토성읍의 친척집에 고모를 소개해 보냈다. 숙명여대 대학생은 국군 지프차가 지나가는 날 차를 멈춰 세워 자신과 고모를 삼팔선까지 태워달라 부탁했다. 국군 장교는 그녀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짐을 풀어보라 했다. 고모의 짐에서 인민군 병원에서 받은 이북 지폐들과 이화고녀에서 받은 호국훈련 증서가 나왔다. 장교는 돈을 밭에 뿌린 뒤 그녀들을 차에 태웠다. 삼팔선까지 태워주기로 했던 장교는 그녀들을 혜화동까지 데려다주고 떠났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고모부를 기다리며 신문사 앞에 서 있던 고모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강원도 민가에서 고모를 남겨두고 도망친 동생이었다. 서로의 살아있음에 놀란 그녀들은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다. 동생은 그날 아침 길에 나섰다가 국군 차를 만났고 국군 간호사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했다. 고모는 그 순간 그 날 동생과 같이 있었다면 꼼짝없이 인민군 소대에게 끌려가 다시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명의 야매 간호사가 주워삼킬 세코날조차 없는 곳으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고모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것이 극한의 상황에서 고모가 본,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었다고.
올해 초에 고모는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본인 성격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누구도 귀찮게 하지 않고 혼자 돌아가셨다. 이제 나에게는 이 이야기와 못 받았던 전화에 대한 후회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