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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Jan 18. 2021

시골의 개들 2.

전원주택에 산다.

산책을 잘 끝내고 집에 왔는데 왜 간식도 안 주고 엄마는 나만 두고 어디를 급하게 나가느냐며 다급하게 짖는 룡이를 제대로 달래지도 못하고 바쁘게 강아지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갔다. 차 운행을 못 할 것 같았는데 버둥거리는 꼬물이들을 싣고 차를 운행해서 왔는지 애들을 태운 1톤 트럭은 단지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내가 새벽에 본 것 같은 통통한 진저맨 세 마리. 에스메랄다는 하얀 아인데 에스메랄다의 아기들은 모두 잘 구운 진저맨 쿠키같다. 우리 룡이도 애기 때는 진저맨이었는데. 겁을 잔뜩 먹은 아이들은 트럭 짐칸에서 똥을 지리고, 오줌도 지리고 난리가 났다. 조금만 기다려주지. 그러면 내가 두 마리는 안고 올 수 있는데 싶은 아쉬움이 생겼다. 보아하니 한 마리는 아주 깨방정이고, 두 마리는 아주 겁이 많다. 어쨌거나 에스메랄다에게는 너무 황당한 일이겠지만 세 마리는 적어도 길거리 생활은 안 하게 됐다. 부디 좋은 보호자를 만나서 행복한 생을 보내길.

"그런데 얘들은 어떤 분들이 데려가신대요? 세 마리 다 입양된 거예요?"

"아니요. 두 마리는 갈 데가 있는데 한 마리는 룡이 동생으로 데려가세요."

"안 돼, 안 돼. 데려갈 수 있었으면 에스메랄다 임신했을 때 데려왔지요. 우리 집은 이미 반려 동물 포화 상태라."

"룡이는 안에서 살고, 얘들은 밖에다 묶어놓고 키우면 돼죠."

내가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만 대놓고 얼굴 앞에서 말하는 걸 들으니 다시금 입이 닫히고 상대만 빤히 쳐다보게 된다. 시골에 와서 반려견에 대한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큰데 갇혀있거나 혹은 묶여 있는 애들 아니면 아예 들개처럼 방치된 애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단순히 얘기하기로는 들개들이 위협적이라고 하고 실제 텔레비전에서도 무리지어 다니는 들개떼들의 습격을 받는 동네에 대한 사건들들도 방송이 되던데 이 동네에 와서 내가 겪은 바로는 들개는 오히려 위협적이지 않다. 우선 들개는 사람들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뿐더러 간혹 보인다 할지라도 가까이 다가오거나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룡이 산책 때 가지고 다니는 간식을 좀 나눠주고 싶어도 너무 멀어서 던져 주지도 못할 정도라 애들이 잘 볼 수 있게 간식을 땅에 놓아두고 부디 잘 찾아 먹기를 바랄 뿐이다. 룡이 들개를 만나도 서로 못 본 척 각자 갈 길을 가서 들개를 보고 흠칫하며 반응을 하는 건 오히려 나 혼자 뿐일 때가 많다. 정말 위협적인 경우는 묶여 있거나 갇혀 사는 애들의 경우다. 도대체 저 케이지에서 몇 마리가 있는 거야 싶을 정도로 체구가 작은 애들이 여러 마리 있는 경우나 저런 견종의 애를 왜 케이지에 가둬놓고 키우지 싶은 애들부터 자기 집 대문 안쪽도 아닌 동네 길가 나무에 쇠사슬로 묶여서 있는 애들은 절대적으로 피해 다녀야 한다. 물론 낮은 담장이 쳐진 마당에서 풀려 있는 애들도 위협적이긴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서나 강아지를 산책 시킬 때는 강아지 보다 먼저 주변을 살피고 위험하다 싶으면 피하거나 아이를 안아야 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위험적인 요소가 더 많다. 움직임이 제한된 아이들은 자기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에서 어떤 것들이 지나가든 간에 위협적으로 짖어댄다. 다행히 룡이는 다른 개들의 흥분에 반응하는 아이는 아니라 갑작스러운 짖음에 움찔하기는 해도 모른 척 지나가서 고맙기까지 한데 마치 케이지를 뚫을 듯, 목줄을 끊을 듯, 담장을 덤을 듯한 위협은 상당히 무섭다. 그래서 그런 곳들은 산책 코스에서 뺀다. 더 황당한 경우는 흥분하며 짖는 개들의 견주들이 이런 상황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거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이 길로 다니지 말아라, 우리 개한테 물리면 나는 책임 지지 않는다.너무나 단호한 요구에 대꾸를 할 여지조차 없을 정도다.

"나는 강아지를 그렇게 키우지 않아요."

"아휴, 너무 유별나게 키워서 그래요. 시골은 다 묶어 놓고, 짬밥 먹여서 키우고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커."

이제 겨우 서른을 넘은 젊은 남자가 왜 이런 옛날 노인네들 같은 소리를 하는지 나는 이게 이해가 안 간다.

"얘들도 한 마리는 저기 교회집 사장님이 키우신대고, 한 마리는 저기 콘테이너 농막집 사장님이 데려가신다는데."

오 마이 갓! 절망스럽다. 교회집 사장은 내가 아는 것만 이미 세 마리의 강아지를 보낸 사람이다. 처음에 키웠던 진돗개 백구와 보더콜리는 몸집이 커지면서 냄새나고 감당하지 힘들다면서 원주인에게 갔다. 충격적이었던 건 보더콜리의 몸에 엄청난 진드기가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쁘다고 머리를 쓸었는데 손바닥에 우둑우둑 느껴지는 진드기. 진드기라는 걸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털이 뭉쳤는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보니 그집 여자가 개를 눕혀놓고 털을 고르는 걸 보고 뭐 하시느냐 물으니 진드기를 잡고 있노라고, 며칠 전에도 잡고 나서 너무 비위가 상해서 토했노라고 하는 말이 뭔가 자랑스럽게 들렸더랬다. "구충제를 먹여도 그래요? 그럼 한 번 털을 깎아서 정리를 하시는 건 어때요?"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유, 개한테 왜 돈을 써? 이거 관리도 안 되고 몸집도 크고, 냄새나서 보내려고." 그러고 나서 그 집에 살던 두 마리는 사라졌다. 후에 다른 이웃에게 얘기를 들으니 진돗개 백구는 강아지 티를 벗은 날부터 맹렬한 짖음과 동시에 주변에 있는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듯 잡아 죽여서 그걸 본 이웃들이 몇 번 개에 대한 관리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후 룡이의 한 배 형제 중 솜뭉치같이 하얗고 촐랑거리는 강아지를 데려갔는데 그 애는 단지를 멋대로 쏘다니다가 결국 크리스마스 즈음에 단지 내에서 로드 킬 됐다. 태어난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은 때였다. 사실 내 차에도 뛰어들어 두 번 정도 사고가 날 뻔 했고, 그걸 빤히 보고 있는 주인 내외는 "반가워서 그래."라는 말로 자기 강아지에 대한 책임을 대신했다. 물론 솜뭉치 같던 하얀 강아지도 진드기를 브로치처럼 매달고 다니긴 했다. 보다 못한 반려견 동료가 자기 강아지에게 발라주고 남은 용량을 발라준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교회집 내외의 강아지들이 어땠는지는 안 봐도 뻔 했다. 그나마 현재 키우는 강아지는 내가 제발 강아지 관리 좀 하라니 현관 앞에 묶어 놓긴 해서 적어도 로드킬에 대한 위험은 일부 사라진 듯 하지만 종종 운동하라고 그냥 풀어주면 역시나 멋대로 돌아다니긴 한다. "운동하라고 풀어주면 그때 가서 똥 싸고, 오줌 싸고 다시 와. 나는 애 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그 똥을 나는 자주 본다. 우리 집 잔디밭에서 똥을 싼다. 룡이랑 친해서 목줄이 풀리면 바로 우리 집으로 오는데 아무래도 그때 싸는가 싶다. 물론 교회집 사람들은 한 번도 자기 강아지가 싼 똥을 치운 적이 없다.

"그런데 교회집은 강아지 키우고 있잖아요. 그런데 또 들인다고? 저 집에서 키우는 거래요, 아님 다른데 보내는 거래요?"

"같이 묶어 놓고 키우면 되지. 쬐그만 거 두 마리 키우는 게 뭐 어렵다고. 열 마리도 키우겠구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집 마지막 강아지는 이후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비가 많이 오기 시작하는 여름의 초입이었나부터 강아지의 자리는 현관 앞이 아닌 지하 창고로 옮겨졌다. 아마도 비 피할 곳이 없이 짧은 처마 사이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던 아이가 비가 잦아지자 몸이 젖으며 개비린내가 났을 거다. 손님이 많이 오는 집이었고, 발랄한 마지막 강아지는 사람을 좋아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좋아서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보이고는 만져달라 머리를 들이미는 아이여서 누구나 좋아했다. 그런 애가 젖어서 냄새가 났으니 그집에 사는 사람이나 드나드는 손님이나 이제 강아지는 귀여움의 존재가 아닌 악취가 나는 털뭉치였을테니 치워버린다는 개념이었을 수도. 물론 그집에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었다고는 했다. 지저분한 담요 한 장과 작은 케이지를 두고 목에 짧은 쇠사슬을 채워두고 말이다. 룡이와 산책길을 다닐 때마다 사람 걸음으로 약 두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아이가 그래도 발랄함은 잃지 않고 연신 꼬리를 흔들며 우리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여름이 지날 즈음에 임신을 했다. 아직 한 살도 안 된 강아지의 첫 생리가 지나고 첫 발정이 왔을 때 아마도 동네를 다니는 들개의 소행일 것이다. 아이가 임신을 한 지도 몰랐던 그집 사람들은 출산이 임박해오자 케이지 안에 전에 깔아 주던 더러운 담요를 넣어주면서 아이를 가둬버렸다. 이후 혼자 아기를 낳은 발랄한 아이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농장에 갔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기회가 생겨 넌지시 물어 보니 "냄새나고, 관리도 안 되고, 자꾸 새끼도 날 거고 해서 새끼랑 같이 해서 농장으로 보냈어. 아주 환경도 좋고 그런 곳이래." 그러길래 새끼를 안 볼 거면 미리 중성화를 해주지 않았느냐 아이가 발랄하고, 순하고, 사람도 좋아해서 아주 예뻤는데 아쉽다고 했더니만 예의 그 "누가 개한테 돈을 들여?"로 대화는 종지부를 찍었다.

"농막 사장님 댁은 그 댁 사모님이 강아지 싫어하셔서 결혼 전에 키우던 애도 정리하셨다셨는데 키우시겠대요?"

"그냥 컨테이너에 두고 가끔 올 때마다 챙기면서 키운다고 그러던데."

룡이는 컨테이너 농막 주인을 싫어한다. 볼 때마다 털을 세우고 짖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룡이를 데려오기로 마음 먹기 전. 그러니까 룡이 더 어리고, 다치기 전에 엄마를 따라 스트릿 시절을 보내던 그 시절 농막 주인은 룡이와 룡이 엄마에게 돌을 던지며 위협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농막이 설치되기 전 그 땅은 룡이 엄마의 아지트였고 룡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후 농막이 들어서며 룡이 엄마는 눈도 못 뜬 아기들을 입으로 물어 나르며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적당한 자리를 잡은 후에도 전에 살던 곳을 배회했는가 보다. 그리고 보지 못한 낯선 이가 나타났으니 새끼를 돌봐야 하는 예민한 엄마 개는 분명 사납게 짖었을 거다. 미처 가까이는 못 가고 멀찌기서 그때 농막 주인 왈, "나는 짖는 개가 제일 싫어, 싸가지가 없잖아 사람한테." 하면서 돌을 던지며 위협했고 룡이 엄마는 뒷걸음 치며 달아났다. 약한 존재에게 하는 행위를 보면 인격이 보인다. 허허실실 잘 웃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말을 하려고 하고, 인심 후한 농막 사장의 민낯이 그랬다. 시간이 조금 지나 룡이의 엄마는 동네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고 혼자된 룡이 갓 젖을 뗀 무렵 컨테이너 농막 밑에서 몸을 숨기며 살았다고 한다. 농막 주인은 본인은 원래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와이프가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건 싫어하니 룡이 컨테이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얘길 몇 번 들었다. 그리고 룡이를 잡으려고 몇 번이나 달려들었고, 이에 룡이는 도망치는 일의 반복. 룡이는 지금도 누가 잡거나 안으려고 하면 도망을 친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들이밀고, 앉아 있으면 몸을 붙여 앉거나 손을 핥아주는 나라도 용이를 내맘대로 안을 수가 없다. 간식으로 아무리 유혹을 해도 룡이는 잡으려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다. 산책 때 하네스를 채울 때에도 먼저 다가갈 수 없다. 하네스를 손에 들고 무릎을 접고 앉아서 기다리면 살금살금 와서 머리를 쏙 넣는다. 룡이는 어릴 적 일을 기억한다.


전에는 밭이나 논이었던 땅에 이동식 주택이나 컨테이너 등이 농막으로 들어서면 혼자 사는 개가 거의 있다. 언제 다 먹었는지 싹싹 핥아서 깨끗해진 그릇과 부유물이 둥둥 떠 있는 더러운 물 그릇과 함께 말이다. 케이지에 갇혀 있기도 하고 쇠사슬로 묶여 있기도 하고 여튼 쟤는 왜 저기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덩그러니 있는 개들이 꽤 많다. 룡이 산책길에 마주치면 골치 아픈 세 마리의 개들도 이런 애들이다. 울타리를 친 견사에 있지만 지붕은 없어서 애들이 자라는 속도로 봤을 때 조만간 울타리를 넘어서 탈출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직 강아지이긴 하지만 대형견 세 마리가 룡이를 보고 달려 들었고 룡이는 혼비백산했으며 나는 룡이를 안고 세 마리 개들을 쫓아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인도 없었고, 세 마리 개들을 흥분해서 뛰어들고, 나는 룡이를 안았지만 룡이도 겁을 잔뜩 먹어서 흥분 상태로 몸을 뒤틀며 도망치고 싶어하고. 그날을 생각하면 너무 아찔하다. 차라리 이 개들이 내 다리라도 물고 흔들어서 힘이라도 빠졌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날 이후 그 개들이 사는 농막 근처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 비슷한 사고를 대비해 산책 가방에는 간식을 더 넉넉히 넣어서 다닌다.

어차피 나와는 반려 동물에 대한 돌봄 철학이 다른 사람들이니 내가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일단 듣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불편하지 않게 피하거나 신고를 하거나 정도인데 신고를 할지라도 동네 청년의 말대로 그렇게 키우는 걸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한테 씨알이나 먹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포기하게 되고 만다. 아마도 도시라면 다르겠지. 도시라면 혼자 묶여 있으면서 먹이와 물을 먹지 못하는 개라든가, 울타리를 도망쳐 나와 위협을 주는 개라든가, 혹은 주인이 있더라도 목줄없이 다니는 개에 대한 신고와 그에 따른 조치가 따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별스럽고 유난스러운 여자의 헛소리일 뿐일 것이다.  우리 개는 묶여 있는 애라 예민하고, 언제 풀릴지 모르니 우리 집 앞길로는 다니지 말라고 경고를 주는 견주가 있는 곳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피하는 일 밖에는 없다.


에스메랄다의 진저맨 세 아이들이 가려는 집으로 잘 인도가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청년의 얘기를 더 듣기 힘들었고 너무 미안하지만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는 즉흥적인 행동으로 진저맨 세 마리를 내가 데려올 수 있겠다 싶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반려견 동지와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설마 이런 더위에 어린 강아지를 컨테이너에 혼자 넣어두진 않을거라고 우리끼리 얘기를 했다. 그집 여자가 강아지를 들이는 걸 싫어할지라도 아직은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강아지니까 적어도 성견 비슷한 모양이 잡힐 때까지는 실내에서 키울 거라고 서로의 걱정을 위로했다.

그날 밤 나는 느끼지 못 했지만 룡이는 뭔가가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컨테이너 농막 쪽을 향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연히 룡이 산책길에 반려견 동지를 만나서 진저맨들은 잘 있을까하고 인사를 건넸다.


"얘기 못 들으셨구나. 걔들 그 다음 날에 두 분 다 못 키우시겠다고 하셔서 세 마리 다 보호소로 갔어요."

이후 에스메랄다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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