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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승 Oct 25. 2024

영상편집기자와 2차 트라우마

상처를 편집하는 사람들, 그들의 트라우마에도 배려 필요해


영상편집기자와 2차 트라우마

상처를 편집하는 사람들, 그들의 트라우마에도 배려 필요해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 보도 과정에서 언론은 트라우마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트라우마 영상 송출을 자제하는 등 성숙한 트라우마 대처의 모범을 제시했다. 언론의 트라우마 인식이 그 사회와 개인의 치유와 회복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다. 생명 혹은 신체와 정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충격적 사건을 일컫는 ‘트라우마’는 어느덧 누구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됐다. 정신의학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을 직접 겪거나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경우 또는 충격적인 사건이 가족, 가까운 친척, 친밀한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된 경우에 한해 트라우마로 인정해 왔으나,1)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한 충격적인 사건 영상을 시청하기만 해도 트라우마 증상을 겪을 수 있는 것으로 전문가의 의견이 모이고 있다.


특히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뉴스를 포함한 각종 미디어를 통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연구자들은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한 미디어 노출과 직접 노출을 비교 분석했다. 폭탄 테러 현장이나 그 근처에 본인 혹은 가까운 사람이 있었거나, 부상자나 사망자를 알고 있는 경우를 직접 노출로 정의하고, 뉴스와 영상을 통해 노출된 경우를 미디어 노출로 정의해 분석한 결과, 하루 6시간 이상의 폭탄 테러 관련 미디어를 시청한 사람들이 폭탄 테러에 직접 노출된 사람들보다 급성 스트레스 증상(회피, 재경험, 각성, 불안, 해리증상)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


직접 노출이 아닌 미디어 노출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언론인에게도 적용된다. 트라우마 현장으로 출동하는 취재기자와 영상기자뿐만 아니라, 사무실에서 트라우마 이미지와 영상을 작업하는 영상편집기자 또한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는다. 영상편집기자는 취재기자가 취재한 기사와 영상기자가 촬영한 영상을 검토하여 방송과 디지털 매체에 내보내기 위해 영상을 기획, 구성, 편집한다. 이에 더해 온라인상의 수많은 사진, 영상, 오디오까지 수집·검토해 편집하는 것으로 업무가 확장됐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각종 영상 기기의 보급으로 사건, 참사, 재난 현장을 시민이 직접 촬영해 배포하는 트라우마 목격자 미디어가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지고 있으며, 비전문가의 정제되지 않은 영상은 영상편집기자에게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영상 자료가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놀람과 폭력의 소리(surprise & sound of violence)’다. 특히 충격적이고 잔혹한 장면에 스스로 준비할 시간이 없이 갑작스럽게 노출된 경우 트라우마가 가장 크다. 무심코 재생한 영상에 갑자기 등장한 사망사고, 살인, 훼손되고 절단된 시신, 성폭행, 잔혹한 동물학대 등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것은 참사 현장으로 이동하며 최소한의 준비와 각오를 하고 직면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일상 공간에서 무방비 상태로 경험하는 트라우마다.


영상편집기자라면 대부분 겪고 있는 트라우마 반응은 플래시백(flashback)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미지가 수시로 떠오를 수 있는데, 마치 영화 속에서 순식간에 과거 회상 장면이 떠오르는 플래시백 기법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트라우마 이미지의 플래시백은 별다른 감정적 영향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지만, 섬뜩하고 압도적인 감정과 함께 눈앞에 오래 펼쳐져 있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매우 사적인 시간, 가족이나 연인,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평온한 시간에 트라우마 이미지의 플래시백이 떠오르면 일상이 위협받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2023년 한국방송기자협회에서 주최한 ‘재난취재보도와 트라우마과정’에 참가한 정다정 기자는 트라우마 영상 편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태원 참사 보도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시민들이 촬영한 소위 ‘날것’의 정제되지 않은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확인하며 모자이크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대형 사건이었던 만큼 각 방송사는 오랜 기간 해당 사건을 보도했는데 편집기자들은 이 기간 내내 관련 기사들을 팔로우하며 이태원 참사 영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3)


2차 트라우마(secondary trauma, 2차 외상)라고 한다. 트라우마를 보고 들으며, 마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감정 반응을 일으켜 이에 압도될 수 있다. 원래는 트라우마를 겪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이나 상담사가 2차 트라우마를 경험한다고 보고됐지만, 충격적인 사건과 생존자를 자세히 취재하는 언론인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트라우마 자료를 검토하거나 편집하고, 소셜미디어 사진과 영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2차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다.


한국영상편집기자협회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찾아가는 저널리즘 특강’ 사업과 연계해 협회 창립 후 첫 번째 교육 프로그램 주제를 ‘언론인을 위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리’로 정하고 필자에게 강의를 의뢰했다.4)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한국영상편집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강의에서 필자는 모여 있는 영상편집기자들에게 한 번이라도 트라우마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단 한 명도 경험이 없었다.


충격적인 참사가 발생할 때 영상편집기자는 엄청난 분량의 처참하고 잔혹한 원본 영상을 일일이 검토하고 편집해 시청자들의 트라우마를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뉴스의 최종화면을 제작하는 영상편집기자는 트라우마 예방의 최후 저지선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일상 사무실 공간에서 트라우마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영상편집기자를 위한 트라우마 대책과 지침이 절실하다.


최근까지 기자들은 ‘기자는 강해야 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 것은 당연하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 ‘이런 일에 충격을 받으면 어떻게 기자를 하느냐’는 말로 트라우마의 존재와 영향을 부정하려고 애썼다. 이제는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인정하고 꺼내놓는 태도가 전문성과 회복력의 증거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라우마와 그 영향에 대해 이해하고, 트라우마를 겪는 동료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다. 언론인은 직무 특성상 트라우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대부분 잘 대처하고 회복한다. 만약 고통이 크고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면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1)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2013),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Vol.5, No.5,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2) Holman, E. A., Garfin, D. R., & Silver, R. C.(2014), <Media’s role in broadcasting acute stress following the Boston Marathon bombing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11(1), pp.93-98


3) 정다정, <트라우마 치료는 나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2023 재난취재보도와 트라우마과정, 방송기자연합회, 2023


4)  정찬승. <[한국영상편집기자협회 특강] 언론인을 위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리>, 한국영상편집기자협회, 2024, https://youtu.be/OVngGv2ronA?si=gJhtf_q-1ZKEQ9BS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방송>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kpf.or.kr/front/news/newsPaperDetail.do?seq=59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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