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슬픔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열달 동안 얼마나 많은 슬픔을 먹고 자랐을지,
살아있지만 거의 기억이 없는 3-4년 정도의 시간 동안에도 엄마의 슬픔을 얼마나 배부르게 먹었을지,
기억나는 슬픔들은 너무 구체적인 나머지 글로 쓰지를 못했다.
아기를 가진 사람은 아기가 먹고 싶어 한다며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다 먹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뭐라고 했을까, 뱃속의 아기가 슬픔을 달라고 조른다 했을까,
먹어도 먹어도 자꾸 슬픔을 졸라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을 졸라대서 행복하다고 했을까?
슬픔을 잔뜩 먹고 태어난 아이는 글을 쓰게 되었다.
"언니도 글을 곧 잘 쓰더니, 너도 글을 잘 쓰더라고! 누구를 닮은 재주일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살고 싶지 않을 때마다 쓰기 시작한 글은
출판을 준비할 만큼이나 일상적인 감정이 돼버렸고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구차한 감정도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씩씩하게 죽어나가는 인생 속에서도 슬픔은 있었고,
이별은 벅찼으며, 죽음은 두려웠다.
탄생이란 것 자체에 그다지 축복이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채로도,
작고 여린 것들은 내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
엄마도 그중 하나.
왜 죽어가는 인생을 살아야 하나,
정작 본인의 인생에 애착이라곤 없는 내게도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은 있었다.
갖가지 이유들로 죽어나가는
온갖 것들의 탄생 속에서도
나는 그 여자를 지키고 싶고
또,
사랑하고
그리고 또...
무엇을 왜,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는 명확하게 이야기 못하지만
적어도 무엇과 이별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고.
그래서 내 슬픔은 늘 명확하다.
그래서인지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괴되어지는 나는,
그래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