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정치적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산업화’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공공분야 연구개발'이었다. 성공적인 '산업화' 전후에 '공공분야 연구개발'의 기여가 컸었다. 유치 국외 한인 기술자/과학자/공학자들과 함께 실용화 및 지원 연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같은 국책 연구소들이 산업화 지원과 첨단 산업 역군 양성에 엄청나게 기여하였다. 이때 이후 우리는 과학 및 산업 분야의 태두급 인사들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일례로 한국 석유화학 산업을 이끌어 가고 고도화의 첨병이 된 고분자 분야의 맥을 이야기할 때는 월북한 이 XX 교수님을 시작으로 심 XX, 안 XX 교수님을 태두급으로 꼽을 수 있고 다른 분야도 이 시절 출신의 태두급이 산포되어 발전해왔다. 여기까지가 ‘과학기술처’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을 이끌어가던 헤드쿼터 역할을 할 때의 모습이었다.
산업화되고 한참 후 국가 연구개발 투자를 GDP(혹은 GDI)의 5%까지 끌어올리며 국가의 도약을 이끌어내겠다는 선언이 두드러지게 언급됐던 때가 이태섭 과학기술처 장관 시절이었다. 산업화 지원에 큰 역할을 한 ‘공공분야 연구개발’의 역할을 확인한 후 ‘선진화’의 맹아가 과학계도 움트며 패러다임이 서서히 이동하였다. 이때 독립적인 ‘공공분야 연구개발’이라 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평할 수 있겠다.
선진화를 위해 과학기술은 의례적인 ‘선택과 집중’으로 G7 프로젝트를 거쳐 21세기 프론티어 기술개발 사업으로 이어졌다.
한편, ‘산업화’ 시절의 ‘산업기술연구개발’은 공기업 혹은 민간기업의 절실한 산업화 니즈에 따라 학연이 인력 양성과 연구개발로 참여한 게 원래의 방식과 체계이었다. 정부주도형 과학기술 연구개발 결과가 전략적으로 확장된 선진화 지향 ‘산업기술연구개발’은 참여정부 때 10대 ‘차세대 성장동력’ 사업을 통한 차세대 기간산업화가 두드러진다. 이명박 정부 들어 차세대를 신으로 대체한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축약되며 ‘성장동력사업’ 부분은 망실되고 바로 ‘신산업’(특히 에너지 신산업)을 앞세우기에 이른다. 이렇게 ‘산업기술연구개발’은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과학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연구개발’ vs. '기초기술연구개발', '공공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연구개발'*/
정부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과 '산업기술혁신 5개년 계획'을 통해 '과학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연구개발' 기본 정책이 책임관청 주도로 수립되어 왔지만 혼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용어'의 틀은 동일하나 '용어'의 함의는 달랐다. 헌법 문구 해석에 수많은 헌법학자가 달려들어 연구하듯, '5개년 계획'을 이야기할 때의 '과학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연구개발'은 아래에서 이야기할 세 가지 기술연구개발과도 또 다른 의미를 가지며 틀이 같은 용어가 시대에 따라 무분별하게 혼용되기까지 하였다.
'공공분야 기술연구개발'이 '선진화'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국가 R&D로 이뤄진 '과학기술연구개발' 결과가 종국에 산업화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간의 논리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공공분야 연구개발' 중추인 정부출연연의 위상과 역할 변화에서 엿볼 수 있을 듯하여 정리해보고자 한다.
시대가 복잡다단해지며 '공공분야 연구개발'의 첨병이랄 수 있는 정부출연연의 위상과 역할은 바뀌어왔다는 건 기지의 사실이다. 처음에는 기초기술연구회, 공공기술연구회, 산업기술연구회로 대별되며 구분되었다가 공공기술연구회가 해산, 합병되어 기초기술연구회, 산업기술연구회로 정리되었다. 박근혜 정부 때는 급기야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정부출연연의 위상과 역할이 '기초기술연구개발', '공공기술연구개발', '산업기술연구개발'로 시작하여 '과학기술연구개발'로 통합된 양상으로 변천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의 '과학기술연구개발'도 본 글의 전반부에서 기술한 '과학기술연구개발'과는 많이 다르며 외려 선진화 첨병으로의 '과학기술개발의 산업화'라는 테제가 녹아 있는 혼종, 즉 하이브리드라 볼 수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기관평가를 담당하고 있는 일인으로서 느낀 점도 '과학기술연구개발의 산업화'란 테제가 현 국가과학기술연구회의 위상이며, 과거의 '기초기술연구개발', '공공기술연구개발', '산업기술 연구개발'을 다 담고자 애쓰고 있으나 어수선한 상황이다. '국민 체감형 과학기술연구개발'이나 '난제 해결형 과학기술연구개발'을 내세운 초안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으나 반복된 기관평가를 통해 기초적인 얼개가 겨우 갖춰졌다. 현재의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공공성' 강조로 사실상 '기초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연구개발'에 각기 흡수되어 사라졌던 '공공기술 연구개발'이 전면에 나서며 새로운 방점을 찍고 있다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기초과학'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지만, '기초기술 연구개발'이란 방점은 용두사미가 된 지 오래다. 미세먼지 같은 시대의 난제가 두드러지며 다급하게 '공공기술 연구개발' (물론, 이렇게 체계적인 구분을 하지는 않는다)로 무게중심이 넘어가 버렸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가 담고 있는 ‘과학기술연구개발’의 탈을 쓴 ‘산업기술연구개발'과 '산업기술혁신 5개년 계획'과 맞닿아 있는 '산업기술연구개발'과도 공통분모가 많이 사라졌다 봐도 무방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초로 돌아가자, Back to the basic: 스몰 사이즈 연구'에 관하여*/
혼란스러운 정부주도형 과학기술연구개발의 실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늘 강조해온 ‘기초연구’에 다시금 방점을 둘 수밖에 없다. '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번번이 실패했음을 기억하고 다른 정책과 전략으로 재시도해야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각오가 다시 필요한 때이다. 여기에 더해, 공공기술 연구개발도 국가 난제 해결형으로 다시 강조해야 할 때이니 그대로 끌고 가면 된다. 마지막은 ‘산업기술연구개발’의 처리인데, 이제 정부의 손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산업 체질 강화를 위해서는 결국 가야 할 길이다. 산업부는 이제 정부주도형 산업기술 연구개발 사업을 서서히 줄여나가야 한다. 이런 맥락으로 선진화 과학기술연구개발 정책과 전략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다. 다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으니 실종된 마이크로, 매크로 과학기술로드맵 형태로 다시 제대로 짜는 게 필요하다. 방치하고 가다가는 공멸이다.
정권과 정부는 이미 누가 '늘 과학자'인지 모른다. 정부에서 추켜 세우는 과학자 중 상당수는 과학팔이 B급 연예인이다. '늘 과학자' 상당수는 이미 국가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우리 과학이 살 길은 이들을 대우하고 다시 살려야만 열린다. 무작정연구 유행을 좇는 쭉정이 가짜석학과 석학행세하는 과학팔이 B급 연예인에게서 대단한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유행을 좇는 '빅 사이즈 연구'와 과학 홍보자 수준의 코디네이터가 노벨상에 근접한 '빅 가이'가 될 거란 안일한 기대도 버려야 한다. '빅 사이즈 연구'를 수주하여 그 연구비로 재하청을 주는 구도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산업, 경제의 폐습인 '심각한 재하청 문제'를 학연에서 '창조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소화할만한 규모 연구를 하도록 생태계도 개선해야 한다.
'꾸준한 스몰 사이즈 연구' 지원은 '늘 과학자 살리기' 해법의 일환이다. 직접적인 연구활동이 가능한 '코어 연령 늘 과학자' 중심으로 해볼만 하다. 지원 방식은 ‘평가관리, 정산 없이 충실한 결과보고 중심’으로 지원을 하되 꾸준하고도 장기적으로 말이다. '학계 정치적으로 약은 가짜석학이나 과학팔이 B급연예인'이 아닌, '학계 정치적으로 멍청하지만 실력있는 늘 과학자'들을 위한 연구비 지원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몰지각한 과학계 일각은 '기초연구'의 연구비 지원에 관해 ‘책임, 정산, 보고 없는 정부주도 연구비 지급’, ‘연구결과보고서의 간소화’ 등을 외쳐온 게 작금의 현실이다. 평가지표인 학술발표, 논문, 그리고 특허를 연구개발의 '화장발'에 비유한다면, 연구개발의 '민낯'은 ‘한글로 적힌 연구결과보고서’이다. 연구결과보고서는 아주 중요하며 정부 지원 결과는 공유되어 마땅하다. 누적 수치로 수백 조 이상 투입된 공공분야 연구개발 성과는 학술발표, 논문, 특허보다 제대로 쓴 연구결과보고서에 녹아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때가 왔다.
공공분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있어 ‘평가와 평가관리’가 웩 더 독 수준의 악성종양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평가관리’의 정확성, 공정성이 중요하다 우기며 점점 복잡하고 쓸모없는 가짜 일이 늘어나게 했다. 가짜 일이 늘어나니 쓸모없는 평가관리를 위한 산하기관과 산하기관장이 필요하게 되며, 쓸모없음을 숨기려 상당히들 애쓰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서조차 자주 보게 된다. 문제는 문제점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책과 대응방안이 점점 극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기술이전까지 되었다가 기술이전 사기로 밝혀지거나 아예 사기 기술이었던 '스카이 캐슬형 빅 사이즈 연구' 사례가 제법 많은 편이다. 엄격한 관리, 기술가치평가 등의 절차를 밟았다 주장되었음에도 사기로까지 밝혀지기도 했다.
/*맺으며*/
요즘 매체에 과학이라며 나오는 상당수가 근본 없는 미래학적 요소가 태반이고 공공분야 연구개발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다. 과학 이야기는 많으나 그 가운데에 과학은 없다. 과학 인사들이라 모인 곳을 가도 과학자는 없다. 악화가 영화를 구축하는 일이 과학계에서도 벌어졌다. 과학의 근본과 역사는 ‘올드하다’ 무시되고, ‘최신 연구, 산업동향’과 ‘뜬구름 잡는 미래예측과 전략’이 '과학기술로드맵'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45년 과학의 미래라는 책이 나올 기세다. 이를 가리켜 혹자들은 ‘과학’의 자리를 ‘미래학’이 차지했다고 평한다.
기본 자체가 흔들린 마당에 'Back to the basic',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기초과학을 살리는 길이다.
21세기 프론티어 사업을 위시해 다양한 정부주도형 공공분야 연구개발 결과는 과제 수행과 종료 직후에 평가 자체가 맞지 않았다. 가치와 평가는 오랜 시간 후 민간이 자발적으로 활용하며 빛을 발했다. 오랜 시간 후 빛을 발한 성과는 ‘선정 및 수행 단계에서 주목받지 못한 스몰 사이즈 연구’에서도 종종 나왔다. '벌크 핀펫 기술'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평가하지 않은 추상같은 평가’가 이뤄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의도한 바와 다르게 돌아간다. 빅 사이즈에서 스몰 사이즈로, '의도 없는' 연구 정책으로 정부주도 공공분야 연구개발 생태계를 바꿔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꾸준한 스몰 사이즈 연구의 평가하지 않는 추상같은 평가’로 훌륭한 연구가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늦기 전에 해보자.
2016.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