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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Sep 28. 2020

82년전 시어머니에게 따지던 18살 며느리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내 엄마 김수우남(金壽又男) 여사

나의 엄마 김수우남(金壽又男) 여사는 1921년 3월생입니다. 돌아가신 지 7년. 지금 살아계신다면 올해 100살입니다.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서 양반가에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시절에 무척 보기 드물게도 외할머니와 딸에게 무척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10살이 될 때까지 남장을 시켜서 마치 아들처럼 대하셨고, 집안 행사에도 엄마를 데리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비단장사를 했다는 엄마의 작은 아버지께서 10살이 안된 엄마에게 예쁜 여자 한복을 선물을 하면 엄마는 그 옷을 입고 집안을 서성일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시절 양반가의 딸들은 집 밖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 공부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독선생을 모시고 언문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숙영낭자전'이라는 책을 필사를 하면서 언문을 깨쳤기 때문에 엄마는 글을 읽고 쓰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들처럼 의지하고 귀하게 키웠던 딸이 18살 되던 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르고 골라 천생연분이라는 우리 아버지와 혼인을 시켰습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엄마보다 한 살 아래인 17살. 농업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위로 세명의 누나, 두 명의 형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엄마가 아버지와 혼인을 해서 시댁에 갔더니, 최 씨 고집 한 성깔 한다고 근동에 소문이 난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한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 혼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남독녀라고 해서 했다. 너에게 다른 형제간이 없어서 나중에 네 친정집 재산이 우리 아들 것이 될 것 아니냐?"


그 말을 듣고 18살 새댁인 우리 엄마는 참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따졌습니다.


"제가 어디가 어때서 친정집 재산을 바라보고 혼인을 시킵니까? 남보다 다리가 하나 모자랍니까? 손이 하나 없습니까? 무엇 때문에 친정집 재산을 바라고 혼인을 시킨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따지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할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엄마가 시댁에 처음에 갔을 때 큰며느리(큰동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큰동서는 위로 딸 아래로 아들, 남매를 두었는데 7살 된 어린 아들(장손)도 떼어놓고 시댁에서 쫓겨났더랍니다. 엄마 없는 그 어린 장손이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천덕꾸러기처럼 크고 있더랍니다. 큰동서는 성격이 너무 순해서 시어머니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하고 '나 죽었소'하는 태도에 시어머니는 큰며느리를 아주 만만하게 보고 시키는 시집살이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모진 시집살이 끝에 시어머니는 결국 큰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보네 버려서 엄마가 처음 시댁에 갔을 때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동서의 친정집 주소를 알아내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두고 그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혹시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내가 옆에서 도움이 되도록 하겠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오라고 했답니다.


엄마의 편지를 받기 전에 큰동서는 친정집에 마냥 있기도 그래서 다른 곳으로 식모살이를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랫동서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내어 다시 시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시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큰며느리가 돌아오자 시어머니(할머니)는 '왜 나에게 허락도 없이 네 마음대로 큰며느리를 불들였냐'고 엄마를 무척 나무랐다고 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시어머니에게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우리 집안을 이끌어갈 장손이 엄마도 없이 저렇게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불쌍하게 커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저 장손을 어느 누가 엄마처럼 따뜻하게 키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식은 엄마가 키워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고 되묻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또 아무런 말도 못 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엄마께서 유난히 큰어머니를 잘 챙기시던 모습이 떠 오릅니다. 엄마께서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관광을 가게 되면 꼭 큰어머니를 초대해서 여러 곳을 함께 다니고는 했습니다.


엄마께서 돌아가신 지 7년, 매년 5월이면 우리 형제들은 삼계면 봉현리 한 씨 집안 선산에 있는 친정부모님 산소에서 행사를 갖습니다. 엄마가 혼인을 하던 해 7살이었던 그때의 장손은 지금은 89살이 되었습니다. 그 연세에도 해마다 우리 친정집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서  큰집 오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작은 어머니가 그때 쫓겨난 우리 어머니를 집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 없어. 할머니에게 대들면서도 작은 어머니가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여. 작은 어머니는 내 생명의 은인이여." 하고 말끝을 흐리시고는 합니다.


82년 전 시어머니의 서슬 푸른 모습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할 말은 했던 18살 며느리 우리 엄마.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제가 무척이나 닮고 싶은 당당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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