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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Mar 11. 2023

메리 포핀스 리턴즈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 2019년 2월에 작성했던 글 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를 한 명만 뽑으라면 단연 줄리 앤드류스일 것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1965)과 <메리 포핀스>(1964)의 주인공이었던 줄리 앤드류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보모이기도 하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메리 포핀스와 마리아는 전혀 다르다. 마리아의 본업은 수녀인 반면 메리 포핀스는 프로페셔널 보모이다. 아이들을 성모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마리아와는 달리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에게 냉소적이다. 메리 포핀스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단서는 영화 속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부모들과 계약을 맺고 일하는 보모일 뿐 이고, 계약이 끝나면 다른 집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떠나야 한다. 심지어 떠날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보모들에게 주어진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로부터 현실 세계의 질서를 지켜내는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친구처럼 같이 놀 수 있는 보모를 원한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집을 어지르며 노는 것은 보모의 역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과 보모들은 늘 충돌한다. 아이들이 집을 어질렀을 때 보모들은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직접 치우거나, 아니면 아이들로 하여금 치우라고 명령하거나. 무질서를 방치할 경우 해고된다. 보모들은 고용주인 부모의 마음에 들면서 청소하는 수고를 피하기 위해 아이들과의 기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그 결과로서 집안에 질서를 유지시켜야 한다. 부모들이 하기 싫어하는 악역까지 떠맡는 사람이라면 더 환영받을 것이다. 이 어려운 일들을 메리 포핀스는 너무나도 쉽게 해 낸다.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보모인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보다 부모의 욕망이 더 많이 반영된 캐릭터이다.  



2014년에 우리나라에 개봉된 영화 중 <세이빙 Mr.뱅크스>란 영화가 있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월트 디즈니(톰 행크스)가 PL 트래버스(엠마 톰슨)란 여성 작가에게 메리 포핀스의 판권을 구매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냈다. 판권을 두고 벌이는 두 스타 배우간의 티격태격도 재밌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트래버스 작가의 어린 시절 플래시백을 통하여 밝혀지는 메리 포핀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정체이다. 



메리 포핀스의 원작자인 PL 트래버스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무능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런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던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가 있었다. 현실의 짐을 감당할 수 없었던 트래버스의 어머니는 자살을 기도한다. 그녀의 자살 기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현실로 돌아와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무능한 아버지가 있고, 하루 세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타난 사람이 트레버스의 이모인 엘리이다. 커다란 가방과 우산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엘리 이모는 바로 현실의 메리 포핀스였던 것이다.  



화분들이 들어있던 이모의 가방은 어린 트래버스의 눈에 마법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법사와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엘리는 도착하자마자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란 곧 구원이고 통제를 찾는 일이다. 트래버스는 어른이 되어서야 왜 그 때 이모가 나타났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이모는 엄마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다.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힘든 일을 자청한 이유는 사랑하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현실의 모든 보모들처럼 엘리 이모는 아이들보다는 엄마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세이빙 Mr.뱅크스>에서 아주 잠시 소환되었던 메리 포린스가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통해 다시 돌아왔다. 60년만에 만들어진 속편이다. 리메이크가 아닌 속편이 만들어 진 이유는 아마도 관객들은 새로운 메리 포핀스와의 만남보다는 예전의 그 메리 포핀스와의 재회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녀는 변했다.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한 메리 포핀스는 줄리 앤드류스의 메리 포핀스보다 훨씬 더 나르시스트이고 냉소적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의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는 <헌츠맨>의 아이스퀸이 들어섰다. 찬바람이 쌩쌩 분다는 표현이 어울리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마법 같은 상상의 세계로 아이들을 안내한다. 아이들은 그녀가 만들어 낸 세계에서 자유롭고 아이들이 상상의 세계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질서는 유지된다. 



아이들을 떠날 수 없었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반면 메리 포핀스는 아이들과 이별을 했기에 완벽한 보모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메리 포핀스를 이별의 슬픔이 있는 영화로 기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메리 포핀스와 있을 때 행복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해줘야 하는 역할만은 부모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메리 포핀스가 떠나도 이 영화가 슬프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을 사랑해 줄 아버지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보모도 부모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랑해 줄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당신은 메리 포핀스보다 더 훌륭한 보모이다. 만일 지금 당신의 인생이 엉망이기에 당신이 메리 포핀스보다 더 낫다는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청소를 시작하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청소이다. 청소는 통제를 찾는 일이고 현실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질서가 회복된 후엔 고통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선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 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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